° 족보

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19 01:46 조회1,512회 댓글0건

본문

 

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

'KBS-1TV 시간여행 역사속으로' - 상소편

5) 염흥방(廉興邦: ?~1388, 우왕 14) 

염흥방(廉興邦)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의 아들로, 자(字)는 동정(東亭)이고, 호(號)는 어은(漁隱)이다. 공민왕 2년(1353)에 송천봉(宋天鳳)의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공민왕 6년(135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의 문하(門下)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가 공민왕 12년(1363)에는 위위윤(衛尉尹)으로 승직되었고,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왕이 교육중흥을 위하여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그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주관하였다.
공민왕 16년 7월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며, 공민왕 23년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었다. 또 이해 4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이인임(李仁任)의 북원(北元)사신 영접에 반대하여 투옥된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하였으나 곧 소환되어 서성군(瑞城君)의 봉작을 받았다. 우왕 10년(1384)을 전후한 시기에는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이인임(李仁任)과 더불어 국권을 총단하였다. 우왕 14년(1388)에 조반의 옥사(獄事)를 다루는 과정에서 왕의 미움을 받아 이인임 일파가 숙청 당하면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이색(李穡)과 일찍부터 교유하여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자호(自號)를 어은(漁隱)이라 하고 그에 대한 기(記)를 이색에게 부탁하였으며, 이색은 그를 위하여 수 십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목은집(牧隱集)'에 남기고 있다.
우왕 만년에 그가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권세를 잡고 탐학하는 인물로 변하자, 이색은 크게 실망하여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한미한 집안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田民)을 탈점하고 한꺼번에 큰 집 세 채를 지었고, 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릇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그를 평(評)하여 
동정(東亭)은 옛 것을 좋아하고 몸을 닦으며 참된 마음을 간직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렴주구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개나 돼지 보다 못하게 여기었고, 물고기나 자라 따위에게도 덕화를 입게 하여 널리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상촌선생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그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였고, 또 그가 행례(行禮)를 행할 때는 상촌선생으로 하여금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일찍이 그가 연회를 베풀 때 상촌선생을 직접 보내어 이색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색은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였고, 그 서운함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24396) ??? ??? ????? 38?? 37
?? 070)8821-2877 | ?? 033)262-2878 | ??? haesolschool@naver.com
copyright © 2015 dreamtouchforall.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