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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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춘(金元春), 金正喜
출생: 1789년 06월 03일 시기: 조선후기
사망: 1856년 10월 10일
대표작:〈세한도〉, 〈모질도〉, 〈부작란도〉, 〈추란도〉, 〈불이선란도〉, 《실사구시설》 등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필치가 호방하고 문기가 배어 있는 문인화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우리나라 역사상 예명(藝名)을 남긴 이는 많지만 추사 김정희만큼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는 드물다.
그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예술가로, 금석학과 경학, 시, 서, 화,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 역사 등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추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서예가 혹은 화가로서의 예술적 측면에서 많이 조명되는데, 이는 생전에 ‘평소 저술한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싶지 않아 문자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여, 체계적인 논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 역시 실사구시의 학문관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기울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금석학, 경학 등에서 세운 업적은 조선의 역사학을 비롯해 사상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에서 이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입적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11촌 조카이자 영조가 애정을 쏟은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증손자로, 훗날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보낼 정도로 집안의 권세가 컸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등이다.
그는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태어나던 날 말라붙어 있던 뒤뜰의 우물이 다시 샘솟고 시들어 있던 뒷산의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이에 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6세 때 그가 쓴 입춘첩을 집 대문에 붙여 놓았더니 지나가던 실학자 박제가가 보고 집 문을 두드려 글쓴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안 박제가는 그가 후일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
이듬해에도 재상 채제공이 지나가다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알고 채제공은 “이 아이는 장차 명필로 이름을 떨칠 거요. 그러나 서(書)와 기(技)에 능하면 운명이 기구할 테니 글씨를 금하고 글공부를 잘 시키시오.”라고 우려 섞인 감탄사를 던지고 갔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서울 통의동에 있는 월성위의 궁에서 증조할아버지가 모아둔 책을 읽으며 학문을 닦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학자 박제가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며 개방적, 합리적 사고에 눈을 떴고, 새로운 시대의 학문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은 1809년 24세 때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임명되어 연경에 갈 때 자제 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한 일이다.
중국에서 그는 옹방강, 완원 같은 청나라 명사들을 만나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당대를 풍미한 경학자(經學子)로, 고전의 원류를 연구하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들이었다. 완당이라는 호는 완원이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묵소거사자찬〉
추사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묵소거사’라는 호를 바탕으로 지은 상징적인 어구이다. ‘침묵을 지켜야 할 때는 그때에 맞게, 웃어야 할 때는 웃어야 할 때에 맞게’라는 구절을 시작으로 삶의 깨달음을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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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옹방강의 서체를 배우면서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를 배우고 익혔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서체를 연구한 끝에 만년에 추사체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에도 옹방강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경학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31세 때는 우연히 승가사에 갔다가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업적을 쌓았다. 또한 《실사구시설》 같은 저술을 통해 실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 등 조선의 신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김정희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 예문관검열,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그의 인생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 복직한 일이 있었는데, 헌종 즉위 후 10년이나 지나 다시 이 일이 불거진 것이다.
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으나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이 철종의 증조인 경의군을 진종으로 추존하고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길 때 헌종을 먼저 모시도록 주장해 파직된 일에 연루된 것이다. 1년 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안동 김씨가 정권을 쥐고 있던 때라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고, 만년에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글씨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김정희초상
조선 후기 서화가 허련(1809~1892)의 작품으로 스승 김정희의 말년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수염과 얼굴 주름은 세밀하게 묘사하였지만 의관은 대조적으로 단순하게 몇 개의 선으로 처리하였다. 추사의 제자였던 허련은 추사의 초상을 여러 폭 그렸는데 이 그림은 가장 잘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초상화의 오른쪽에는 “소치 허련사본”이라는 오세창이 쓴 글이 적혀 있어 이 그림의 화가가 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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