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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작품

추사 김정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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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35회 작성일 23-01-1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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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당대에 중국학자들로부터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민족문화의 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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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무진(谿山無盡)은

어찌 해(奚)서 물이 시내(谷)를 이루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진심/진리다.

 

溪(시내계)의 奚 어찌 해가 그 답이다.

추사 김정희는 유배의 심경을 토해낸 것

 

奚은 자신을 노예처럼 조롱한 것이며

溪은 고문에 터지는 피가 시내를 이루었다.

 

고문과 유배는

꽁꽁 묶어 깊은 산 절벽 시렁에 관물한 것이다.

뫼산을 높게 게시하여 배치한 배경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과를 따지지 않고

진아의 태극 무극의 마음으로

할 도리를 다 한다는 것이다.

 

무진의 굳건한 토대의 축조는

그대로 영원히 도(道)이다.

무진은 향상도하(香象渡河)다. 

 

구사일생 도착한 매우 위험한 해남도의 땅 내 후회없네

 

소동파가 해남 담주에서 지음 금산에서 그려준 초상화에 쓰다.

 

마음은 이미 재가 되어버린 나무몸은 메이지 않은 배그대가 평생 이룬 일이 무엇이뇨황주. 혜주. 담주라네

 

내 인생의 최고의 업적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어 온다면3차레 유배생활이었다라는 것이죠 

 

'爪'부분을 왜 생락 했을까?

'계산초로'와는 영 멀리 떨어진 생활

권세의 중심에 서서 민중을 할퀴는 자

 

[출처] [추사 김정희] 계산무진(谿山無盡)의 진리

유배(流配) 파생어 : 유배되다, 유배하다<역사>  오형(五刑) 가운데 죄인을 귀양 보내던 일.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이 있었다.

[비슷한 말]  유적(流謫)ㆍ유찬(流竄).종신 유배 외딴섬으로 유배 보내다 유배 죄인은 귀양길에 오르기 앞서, 신고 겪은 몸을 풀고, 귀양 행장을 꾸리는 데 적어도 닷새 말미를….​

죄인을 귀양보내는 형으로 오형(五刑)의 하나. 조선 시대에는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을 결정하였는데, 2천 리, 2천 5백 리, 3천 리 형의 세 종류가 있었으며, 모든 경우에 반드시 장1백을 더하여 부과했음. 유찬(流竄)이라고도 함.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간 이유는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된 배후조종 협의로 유배를 갔고,

추사는 윤상도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를 가신 이유는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위와 벼슬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길을 떠다신 것입니다.

 

(윤상도라는 하급관리가 3명의 고급관료가 부패하다고 상소를 했는데 이것이 역풍을 맞아 윤상도는 능지처참을 당하였고 문제의 윤상도 투서의 배후로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이 엮이면서 김정희도 연루된 것이지요)

 

유배를 가기전 김정희 선생은 당상관(정3품이상)의 높은 벼슬에 있어 여러 겸직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유배를 가기전 예조참의(정3품 당상관)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탄탄하고 살아있는 필획 계산무진谿山無盡(계산무진) : 시냇물도 산도 다함이 없어라.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기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 소재)이 특별히 아끼며 자랑하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은 이 작품을 추사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추사의 다른 글씨에 비해 필획이나 결구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점을 들어 추사가 이런 글씨를 썼을 리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잘못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 정도의 큰 작품에 아무런 관기(款記: 낙관하는 글)도 없이 도장만 하나 달랑, 그것도 작품의 크기에 걸맞지 않는 아주 작은 도장만 하나 찍혀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면 모를까 필획과 결구를 들어 말하자면 추사가 아니고서는 이만한 작품을 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탄탄한 필획, 살아있는 필획을 설명할 때 흔히 '향상도하(香象渡河)'라는 말을 한다. '코끼리가 강을 건너듯이'라는 뜻이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토끼와 말과 코끼리가 함께 강을 건넜단다. 토끼는 강에 들어선 다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물살에 밀려 둥둥 떠내려 가버리고, 말을 강을 건너긴 했어도 사나운 물살에 밀려 더러는 다리가 강바닥에 닿기도 하고 더러는 다리가 들리기도 하면서 뒤뚱뒤뚱 아주 불안하게 겨우 건넜다. 코끼리만 아무리 강의 물살이 급하고 세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발바닥을 강바닥에 철저히 달라 붙이고서 쭉쭉 밀어가며 당당하게 건넜다.글씨를 쓸 때 붓과 종이도 그렇게 만나야 한다. 강을 건너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붓이 종이에 완전히 밀착하여 강한 마찰력으로 부딪혀야 한다. 그렇게 운필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필획이 바로 살아있는 필획 즉 '향상도하'와 같은 느낌의 필획이다. 추사의 작품 〈계산무진〉은 바로 그런 향상도하의 필획으로 썼다. 어느 필획 하나 천근 만근의 무게로 종이위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 게 없다.필획뿐이 아니다. 결구도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오른 편에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은 변형된 모습의 '谿'자는 해서(楷書)적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잘못 쓴 오자(誤字)이다. '谿'의 왼편 윗부분에 있어야할 '爪'부분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글자를 오자로 보지 않는다. 비록 변형이 되기는 하였지만 자형으로 보나 전체적인 문장의 의미로 보나 '谿'자로 밖에 불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글자는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범위 내에서 기상천외의 변화를 추구하여 이체자도 만들고 별체자도 탄생시켰다. 추사도 그런 변형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爪'부분을 왜 생락 했을까? '谿'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는 '谷'을 지금의 모습으로 오묘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변화시켰기 때문에 오묘한 결구의 '谷'자와 그렇게 정히 잘 어울리게 된 것이다.'山'자는 자형은 전서이면서 필획은 완전히 예서의 필획으로 썼다. '山'자 아래 부분에 과감하게 여백을 남긴 것도 빼어난 장법의 운용이다. '無'자는 괴석처럼 단단하게 뭉친 필획으로 '山'보다 약간 올려서 썼다. 아래에 '盡'자를 놓기 위한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盡'을 '無'아래에 튼실하게 배치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안정된 분위기로 이끌었다. 가히 귀신같은 솜씨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필획과 결구와 포치(章法)가 의도적인 계산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그렇게 써져 버린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명작이다.이 작품은 추사가 만년에 당시 세도정치의 한 복판에 서서 세도를 부리던 안동김씨 김수근(金洙根)에게 써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근의 호가 '계산초로(溪山樵老:시냇물 따라 산에 올라 나무하는 늙은이)'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근은 호는 비록 마치 은자(隱者)인양 '계산초로'라고 지었지만 실지 생활은 권세의 중심에 서서 '계산초로'와는 영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그런 김수근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써달라는 글씨라서 맘에 내키지 않아 한 마디의 관기도 쓰지 않았고 도장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자그맣게 찍은 건 아닐까?


[출처] [추사 김정희] 계산무진(谿山無盡)의 진리|작성자 황도



실학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

 

김정희(金正喜) 김원춘(金元春),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필치가 호방하고 문기가 배어 있는 문인화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대표작: 〈세한도〉, 〈모질도〉, 〈부작란도〉, 〈추란도〉, 〈불이선란도〉, 《실사구시설》 등

시기: 조선 후기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예술가로, 금석학과 경학, 시, 서, 화,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 역사 등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추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서예가 혹은 화가로서의 예술적 측면에서 많이 조명되는데, 이는 생전에 ‘평소 저술한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싶지 않아 문자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여, 체계적인 논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 역시 실사구시의 학문관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기울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금석학, 경학 등에서 세운 업적은 조선의 역사학을 비롯해 사상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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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필 세한도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1844, 종이에 수묵, 23×61.2㎝, 국보 제180호. 작가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 위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쓰고 도장을 찍었고, 그림 왼쪽에는 단정한 해서체로 그림의 제작 경위를 적어놓았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에서 이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의 맏아들로 태어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입적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11촌 조카이자 영조가 애정을 쏟은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증손자로, 훗날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보낼 정도로 집안의 권세가 컸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등이다.

 

◆그는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태어나던 날 말라붙어 있던 뒤뜰의 우물이 다시 샘솟고 시들어 있던 뒷산의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6세 때 그가 쓴 입춘첩을 집 대문에 붙여 놓았더니 지나가던 실학자 박제가가 보고 집 문을 두드려 글쓴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안 박제가는 그가 후일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 이듬해에도 재상 채제공이 지나가다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알고 채제공은 “이 아이는 장차 명필로 이름을 떨칠 거요. 그러나 서(書)와 기(技)에 능하면 운명이 기구할 테니 글씨를 금하고 글공부를 잘 시키시오.”라고 우려 섞인 감탄사를 던지고 갔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은 1809년 24세 때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 겸 사은부사로 임명되어 연경에 갈 때 자제 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한 일이다. 중국에서 그는 옹방강, 완원 같은 청나라 명사들을 만나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당대를 풍미한 경학자(經學子)로, 고전의 원류를 연구하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들이었다. 완당이라는 호는 완원이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김정희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 예문관검열,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그의 인생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 복직한 일이 있었는데, 헌종 즉위 후 10년이나 지나 다시 이 일이 불거진 것이다.

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으나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이 철종의 증조인 경의군을 진종으로 추존하고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길 때 헌종을 먼저 모시도록 주장해 파직된 일에 연루된 것이다. 1년 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안동 김씨가 정권을 쥐고 있던 때라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고, 만년에는 아버지의묘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글과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김정희는 1856년 10월 10일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그가 죽은 이듬해 철종의 명으로 부친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김영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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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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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도’는 詩·書·畵의 일체를 보여주며 초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글씨체를 혼융해내어 그 탁월함을 능히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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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고택 대문으로 들어가 왼쪽 끝으로 이동하여 고택 내부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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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고택

 

이곳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영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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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라고 합니다. 김정희 선생의 벗인 권돈인 선생이 영당을 세우는 일을 도왔고, 영당의 현판은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고 권돈인 선생이 직접 썼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 선생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고 하더군요.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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