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김자수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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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村 先生의 詩想
상촌 선생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부(父)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낸 오 이고, 모(母)는 일직(一直) 손씨(孫氏)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한 정평공(靖平公) 홍량(洪亮)의 따님이다.
상촌 선생은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2남 4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이름을 자수(子粹)라 하고 자(字)를 거광 이라 하고 호(號)를 상촌(桑村)이라고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과거에 합격한 후 관로에 진출하자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고쳤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즐겨하였고 20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로써 성리학 이념의 실천을 생활의 신조로 삼게 된다.
당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등은 상촌의 학문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상촌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지 일년도 못되어 홀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위중하자 귀향하게 된다. 당시 교관으로 있었던 박상충(朴尙衷)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안동으로 떠나는 상촌을 아쉬워하고 있다.
浩然歸志白雲秋 돌아가고픈 마음 호연(浩然)하여 백운(白雲)의 가을 같은데,
호연귀지백운추
太學諸生可得留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어떻게 만류할 수 있을 것인가.
태학제생가득유
侍奉高堂應不暇 고당(高堂)을 모시자면 필시 겨를이 없을 터이니,
시봉고당응불가
那堪一醉映湖樓 영호루(映湖樓)에서 한번 취해 보고픈 뜻 어찌 견디리.
나감일취영호루
상촌은 안동(安東)으로 귀향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였고,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여묘(廬墓)살이 3년을 지낸다.
상촌의 효행(孝行)이 널리 나라에 알려지자 왕은 정려(旌閭)를 내렸고, 또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여묘(廬墓) 생활을 그리게 하고,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 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에는 선생의 효행(孝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낸 김자수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성격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편모(偏母)를 섬김에 있어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 3년을 하였는데, 이 동안 한번도 집에 간 일이 없으며, 한번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날마다 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지나가는 자와 나무꾼들도 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애훼(哀毁)함이 극에 이르니 얼마 되지 않아 성정(性情)을 상하기에 이르렀다. 국왕께서는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정려(旌閭)를 명하시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출거여도(出居廬圖 : 여묘(廬墓)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 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이후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이때의 여묘(廬墓)살이를 생각하면서
문익점(文益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위문하고 있다.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시견안동거악자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자득(自得)해 하더구만.
부빙구리자회회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순생설리성심후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치하고전효열개
3년상을 지내고 귀경한 상촌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무방(李茂芳)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덕령부주부(德寧府主簿)를 제수받고,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환향(還鄕)할 때 일찍이 성균관에서 이색과 정몽주 등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상촌의 장원급제를 축하하였다.
이때 이색이 장원을 축하하여 지은 시이다.
禹門魚躍一聲雷 우문(禹門)에서 어약(魚躍)하니 그 소리 우뢰와 같았는데,
우문어약일성뇌
矯矯群龍變化來 꿋꿋하고 날랜 뭇 용들이 크게 변하여 돌아왔구나.
교교군룡변화래
只把高低比頭尾 다만 높고 낮음만 가지고 머리와 꼬리를 정했으니,
지파고저비두미
若論靈異共胚胎 영이(靈異)함을 논한다면 모두가 함께 배태(胚胎) 했지.
약논영이공배태
在田政値文明運 밭에 있어도 바로 문명(文明)의 운을 만나게 되는데,
재전정치문명운
澤物還同燮理才 만물을 윤택하게 하면 되려 섭리의 인재 같았다네.
택물환동섭이재
最喜病餘參此會 무엇보다 병 뒤에 이 모임에 참여했음이 기쁜데,
최희병여삼차회
風流往事眼中回 풍류의 지나간 일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네.
풍류왕사안중회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정언(正言)에 올랐는데, 그는 직언으로 왕을 보필하였다. 이때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 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왜(倭)를 밀성(密城)에서 쳐서 수십 구를 참(斬)하니, 우왕이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조민수(曺敏修)가 전(箋)을 올려 사양하므로 왕은 상촌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민수(敏修)는 한 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김해(金海)와 대구(大邱)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패몰(敗沒)하여 사졸(士卒)들을 많이 죽였으니, 밀성(密城)에서 비록 조그마한 승리를 하였다고 하나 공(功)이 죄(罪)를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상(賞)으로 하사하는 것도 이미 지나친 것인데, 이제 또 무슨 회교(回敎)를 내립니까? 또 회교(回敎)는 공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이제 민수(敏修)는 공(功)이 없으니, 감히 명(命)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왕이 노하여 선생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지윤(池奫) 및 대사헌(大司諫) 하윤원(河允源)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왕명을 어긴 죄로써 다스리려고 하자, 상촌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간관(諫官)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보필하기 위한 까닭이다. 옛날부터 왕의 말에 불가(不可)함이 있으면 간관이 이를 간(諫)하는 것이니, 원컨대 제공(諸公)들은 나라에서 간관(諫官)을 둔 뜻을 살피라.
라고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크게 노하여 장형(杖刑)을 가하여 유배시키려 하여 이를 도당(都堂)에 의논하니, 모든 재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보림(李寶林)이 말하기를
자수(子粹)는 비록 소유(小儒)이나 간관(諫官)이요, 또 소위 왕명을 어겼다는 것도 대개 사람을 동쪽에 두었다가 함부로 서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으니, 자수(子粹)의 죄는 아마도 이것으로써 논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하니, 도당이 그 말을 “옳다”라고 하여 단지 유배만을 청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순위부(巡衛府)에서 이미 그 죄를 의논하였는데, 이제 다시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태후(太后)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신(臣)은 무인(武人)이라 일에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신(文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비록 뜻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言路)를 여는 까닭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자수(子粹)의 죄가 적은데도 중론(重論)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태후가 우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 그 동안에 많은 일을 경험하였으나 간관(諫官)에게 매를 치고 욕함을 듣지 못하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을 것이니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매는 면하게 하고 전라도(全羅道) 여수 돌산수(突山戌)로 유배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생각하기를 상촌선생은 반드시 낭사(郎舍)와 더불어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우(鄭寓)를 경상도(慶尙道) 죽림수(竹林戌)로 유배하였다. 해가 지나자 편의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고신(告身)을 환급해 주었다.
이후 상촌은 고향인 안동에서 유유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선생의 시에서 당시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新樓壓水對靑山 새로운 다락은 물을 굽어보고 청산을 마주하는데,
신루압수대청산
朝暮烟嵐궤案間 아침저녁으로 연기와 아지랑이 책상 위에 머무네.
조모연람궤안간
幸有村庄재隔岸 다행히 촌장(村庄)은 언덕 하나에 사이 하였으니,
행유촌장재격안
暮年投불共淸閒 늙으막엔 인수(印綬) 내 던지고 한가함 함께 하리라.
모년투불공청한
이때 이곳을 들린 정몽주(鄭夢周)는 상촌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永嘉好水又佳山 영가(永嘉)는 물도 좋고 산도 좋구나.
영가호수우가산
恨未移居向此間 이곳에 옮겨 살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한미이거향차간
客路再過頭已白 나그네 길 다시 지나니 머리는 벌써 희였구나.
객로재과두이백
羨君樓臥作長閒 그대의 다락에 누워 한가함을 부러워하도다.
선군루와작장한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자 이색은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어 축하하였으며,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인 염흥방(廉興邦)이 이에 대한 답례로 연회를 마련하여 그를 초청하자 이색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斯門盛會世無多 사문(斯門)의 장한 모임 세상에 많지 않아서,
사문성회세무다
每向東亭簇玉珂 동정(東亭)을 찾으면 인재가 가득하더라.
매향동정족옥가
桃李門庭移日語 도리(桃李)의 문정(門庭)에서 늦도록 말을 나누는데,
도리문정이일어
綺羅絃管알雲歌 비단결 같은 관현(管絃)은 구름도 멈춰서서 노래하네.
기라현관알운가
滿前才俊今如許 뜰 앞에 가득한 재준(才俊)들 이제는 얼마나 되는지,
만전재준금여허
居右衰遲我奈何 상석에 앉은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어찌할꼬.
거우쇠지아내하
泥醉夜深歸柳里 크게 취하여 깊은 밤에 유리(柳里)로 돌아오니,
이취야심귀유리
洗空塵慮세天河 티끌 같은 마음 말끔히 씻기니 은하수가 다가서네.
세공진려세천하
상촌은 이색의 문하에서 많은 학문을 교류한다. 상촌은 이색을 찾아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한다. 이에 이색은 크게 기뻐하면서 자(字)에 대한 설(說)을 지어 주었는데, 그 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인년(甲寅年) 장원(壯元) 김정언(金正言)이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은 자수(子粹)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선생께서는 그 뜻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수는 마음속 깊이 이를 간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바가 또한 얕지 않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명(命)은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는다.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고 크면서도 빠뜨림이 없으니, 어찌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와 상뇌(霜露)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 어찌 일찍이 조그마한 어김이라도 있었던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와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乾卦)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자강(自强)하여 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사람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하겠다. 군자(君子)가 자강(自强)하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廢)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에 이르자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보다 후에 하더라도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하니, 하늘이 바라는 묘한 이치가 이에 나타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역(易)의 괘효(卦爻)를 찬(讚)하였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주공의 뜻을 따르는 바이다.
붉은 신발을 보더라도 진중한 모양을 갖춘다면 마음이 어찌 순일(純一)하지 않겠는가. 문왕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를 파장결부(破장缺斧)의 때에도 행하니, 이로써 풍속을 바꾸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은 순일하여 쉬지 않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말하기를 “역경(易經)에 처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주공(周公) 같은 성인(聖人)도 이와 같은 때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디를 쫒아서 그 효(孝)를 성취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純仲)이 장원(壯元)에 뽑히어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가히 현달(顯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에 버림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 권면하는 바이니, 지킴이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지킴이 있으면 순일(純一)하여 질 것이다.
상촌이 이색을 생각하며 지은 시.
東國文章集大成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동국문장집대성
稼亭父子冠群英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가정부자관군영
山川孕秀今猶古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산천잉수금유고
借問何人繼盛名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차문하인계성명
정몽주는 공양왕 4년 4월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것은 바로 고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상촌은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였고,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상촌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정몽주는 상촌과 비록 15세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상촌을 벗으로 예우하였고, 상촌 또한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예(禮)를 다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상촌이 안동(安東)으로 낙향하였을 때 그가 직접 안동으로 찾아와 위로하였고,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 서 그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지은 상촌의 시에서도 보인다. 이때 상촌은 정몽주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있다.
烏川先生傑作 오천선생(烏川先生 : 정몽주)의 작품은 훌륭하도다.
오천선생걸작
字화整整斜斜 자(字)와 획이 바르고도 비스듬하도다.
자화정정사사
道德優遊聖域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도덕우유성역
篇章獨步詩家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도다.
편장독보시가
壁間喜看濃墨 벽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벽간희간농묵
板上恨未籠紗 마루[板上]위에서는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는구료.
판상한미농사
屹屹高山仰止 우뚝하게 높은 산[포은을 지칭] 우러러 보니,
흘흘고산앙지
顔衰正怯年華 나이 늙어 얼굴이 쇠하니 참으로 두렵도다.
안쇠정겁년화
박상충은 상촌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이는 상촌이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의 시중을 위하여 성균관을 퇴관할 때 상촌을 아쉬워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귀근(歸覲)하는 생원(生員) 김자수(金子粹)를 보내면서(送生員金子粹歸覲安東)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염흥방은 상촌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상촌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그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였고, 또 그가 행례(行禮)를 행할 때는 상촌으로 하여금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일찍이 그가 연회를 베풀 때 상촌을 직접 보내어 이색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색은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였고, 이색은 상촌의 장원 연회에 참석치 못한 아쉬움을 시로 표현했다.
少壯元招老壯元 젊은 장원[金子粹]이 늙은 장원[李穡]을 초대하는데,
소장원초노장원
壯元郞又特傳言 장원랑(壯元郞)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는구나.
장원랑우특전언
斯爲盛事足驚世 이것은 장한 일이라 세상을 놀라게 할만 하지만,
사위성사족경세
只恨病軀難出門 다만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지한병구난출문
聚散却同萍與水 만나고 헤어짐은 흡사 물과 부평초 같으며,
취산각동평여수
閑忙只合酒盈樽 바쁘고 한가함은 술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가.
한망지합주영준
四支調適知何日 사지(四支)는 어느 때나 제대로 풀릴 것인가.
사지조적지하일
風雨蕭蕭獨의軒 풍우(風雨)가 소소(蕭蕭)한데 홀로 마루에 기댔도다.
풍우소소독의헌
문익점과 상촌과의 관계는 상촌이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깊은 교유가 있었고 상촌보다 20여년 이상의 연상이었지만, 상촌의 학문과 인품을 사랑하여 마치 벗과 같이 대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상촌이 여묘(廬墓)생활을 마치자, 이를 위로하면서 보낸 김정언(金正言) 순중(純仲)의 여묘(廬墓)를 위문하며(慰問金正言純仲廬墓)라는 시에서 알 수 있다.
권근은 상촌과 막역한 벗으로 지냈다. 권근은 상촌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과거는 5년이 앞서는 공민왕 18년(1369)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막역하게 지냈다.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고, 상촌은 이색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허물없는 지기(知己)로 교유하였다.
이들은 우왕을 섬길 때 왕에게 직언(直言)으로 간하였고, 이로써 상촌은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되었으며, 그도 왕의 미움을 받게 된다.
상촌이 정언(正言)을 제수 받고 고향으로 떠날 때 권근이 이를 아쉬워하며 지은 시다.
匹馬千山路 필마(匹馬)로 첩첩산길을 돌아가는데,
필마천산로
孤鴻八月秋 외로운 기러기 날으니 팔월의 가을이로다.
고홍팔월추
歸寧之子迫 부모를 찾아 떠나는 그대이니 무척도 바쁠 터이지만,
귀녕지자박
惜別故人愁 작별을 아쉬워함은 친구의 심정일레라.
석별고인수
芋栗村中樂 토란과 밤 등은 마을에서의 즐거움이고,
우율촌중락
박로物外遊 순채와 농어회로 세상 밖에서 노닐테지.
박로물외유
也應同去광 필시 함께 광을 떠나가면서,
야응동거광
笑我自悠悠 나 홀로 유유(悠悠)하다고 비웃을 테지.
소아자유유
조계생(趙啓生)은 공민왕 12년(1363)에 출생하여 창왕 즉위년(13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그는 상촌의 후학으로 항상 그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교유하였다. 일찍이 상촌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생각하면서 한산제영(韓山題詠)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의 운(韻)을 차(次)하여
山傍熊津疊장成 산은 웅진강(熊津江)을 끼고 첩첩병장 이루어,
산방웅진첩장성
終敎李氏품其英 마침내 이씨일문(李氏一門) 그 영기(英氣)를 타고 났도다.
종교이씨품기영
自從父子登科後 저 멀리 원(元)나라에서 부자(父子)가 모두 등과(登科)하니,
자종부자등과후
天下皆知此邑名 천하(天下)는 모두 이 고을의 이름을 알게 되었네.
천하개지차읍명
라는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이문화(李文和)는 인주인(仁州人)으로 자(字)는 백중(伯中)이며, 호(號)는 오천(烏川)이다. 우왕 6년(1380)에 염흥방(廉興邦)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상촌에게는 동문(同門) 후배가 된다. 그도 일찍부터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색도 그를 위하여 자(字) 백중(伯中)에 대한 설(說)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상촌을 선배로 받들어 존경하였다.
상촌이 일찍이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정몽주(鄭夢周)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문화는 이때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
聞韶山水蕭灑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맑고도 깨끗하여,
문소산수소쇄
夜靜簾소月斜 밤은 고요한데 발[簾]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야정렴소월사
柳色靑靑客舍 버들잎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유색청청객사
香烟苒苒僧家 향기로운 내음이 승가(僧家)에서 은은히 스미네.
향연염염승가
憂民便爲鶴髮 백성걱정에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우민편위학발
得雨還岸烏紗 비를 만나 강안(江岸)에 돌아온 검은 모자,
득우환안오사
六月未成一事 여섯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육월미성일사
却참前後皇華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각참전후황화
김진양(金震陽)은 계림부인(鷄林府人)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초려(草廬) 또는 초옥자(草屋子)라 하였고, 동두(童頭)라고도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이색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제수받았다. 이후 서해도(西海道) 안렴사(安廉使)와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쳤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공양왕 3년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고, 이어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는 글을 올려 유배시켰고, 이어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공양왕 4년(1392)에는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몽주와 이색의 당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김진양은 상촌보다 3년 먼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이들은 서로 벗으로 지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고 성격이 유달리 강개하였는데, 이점에서 상촌과는 항상 통하였고, 또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상촌이 일찍이 빙허루(憑虛樓)에서 김사고(金師古)의 운(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김진양도 더불어 같이 시를 지었다.
此樓臨水又依山 이 다락은 물에 다달았고 산도 의지하였으니,
차루임수우의산
仁智兼全二樂間 인지(仁智)는 이요(二樂)를 아울러 가졌도다.
인지겸전이락간
欲識主人成德處 주인의 큰 뜻 이룬 뜻을 알고 싶어 하거들랑
욕식주인성덕처
軒裳不動一心閑 벼슬에도 동하지 않는 마음, 한가함을 보려므나.
헌상부동일심한
정복주(鄭復周)는 동래인(東萊人)으로 자(字)는 사고(師古)이고, 호(號)는 죽당(竹堂) 또는 육괴(肉塊)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강개하였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는데 엄격하였다. 상촌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가 일찍이 전라(全羅) 도관찰사(都觀察使) 장자충(張子忠)의 막사로 떠날 때 상촌은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은 시이다.
惜別贈何物 이별의 아쉬움 무엇으로 증별(贈別)할 건가.
석별증하물
一盃千里春 한잔의 술에 천리의 봄 담아 보내노라.
일배천리춘
島夷方梗化 섬 오랑캐들 바야흐로 찍자부리고 있나니,
도이방경화
須使自來賓 모름지기 스스로 감화되어 오도록 하려므나.
수사자래빈
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다.
상촌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1374)의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미 그 기반은 닦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을 것이다.
우왕 원년에 그가 정언(正言)을 제수받고, 이색을 찾아가서 그의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는데, 이때 이색은 그의 학문의 깊이에 대하여 칭찬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색은 처음에 “나는 비유하면 제패(제稗)와 같다. 학문이 조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찌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거절하였으나, 상촌이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음이여! 문왕(文王)의 순수한 덕(德)이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문왕(文王)의 업적이 하늘의 뜻에 부합한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로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것이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건(剛健)하고 정중(中正)하며, 순수(純粹)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德)입니다. 건(乾)의 덕(德)은 문왕(文王)의 덕(德)과 같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이색은 그가 학문의 대도(大道)를 깨우친 것을 알고 기뻐하면서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賢人)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聖人)은 하늘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것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설(說)을 지어 주고 있다.
위에서 볼 때 그는 이때 이미 성리학의 정수(精髓)를 체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건괘(乾卦)의 논리를 차(借)하여 자(字)로 하였고, 또 천(天)의 이치를 문왕(文王)의 덕(德)과 비유하면서 자신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생활철학으로 하여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리학 이념을 실현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행적은 당시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가 3년 동안 시묘(侍墓)할 때 이를 직접 목도한 남을진(南乙珍)은
來見居廬子 내려와서 시묘(侍墓)하는 사람을 보니,
내견거려자
점前祭禮明 거적자리에 제례(祭禮)도 밝더라.
점전제례명
筍生誠意근 죽순이 난 것은 정성이 간절함이며,
순생성의근
栢枯孝心傾 잣나무 마른 것도 효성이 지극함이지.
백고효심경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예법(禮法)과 효행을 기리고 있다.
당시 고려사회의 사상적 이념은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당시 이색, 정몽주 등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구조를 개변시키려고 하였으며, 또 이러한 의도에서 이들은 공민왕 16년에 교육중흥을 일으켰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진 명제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의 실천과 이단(異端)의 배척이었다. 그 또한 이러한 이념의 실천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하였고, 또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서 이의 실현을 건의하였다.
상촌은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것은 의성(義城)에 있는 김전서(金典書) 유(游)에게 보낸 제문(祭文)에서도 보인다.
返我初服 나의 초복(初服)으로 돌아오니,
반아초복
薇蕨其志 미궐(薇蕨) 같은 그 심지(心志)요.
미궐기지
樂我名敎 나의 명교(名敎) 즐기니,
낙아명교
與世相違 세상과는 괴리(乖離)가 있었도다.
여세상위
상촌선생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라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겸하고 있을 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당면 정치의 개혁안 시무 5개 조항을 올렸다.
첫째, 왕대비(王大妃)에 대한 예(禮)를 존숭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도록 건의하였고,
둘째, 봉숭도감(奉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데 대하여 이는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그 설행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셋째, 왕의 숭불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고,
넷째, 무당들의 행패를 근절시키고 이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건의하였고,
다섯째, 지금까지 직언(直言)으로 폄출된 자들을 소환하도록 건의하였다.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 좌상시(左常侍)로 전보되었을 때 상촌은 동료들과 함께 왕에게 건의하였다.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10인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 요행히 함부로 천거된 자 들입니다. 이들은 혹은 창기(倡妓)에 의탁하거나 혹은 친척의 연분으로 청탁하여 벼슬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방편상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되니, 진차(眞差 : 眞職과 假職)와 첨설(添設)이 문득 100여 자리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기(名器)의 범람함과 염치의 상실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컨대 이들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직을 모두 박탈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또 삼사(三司)의 관원수가 15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녹패(錄牌)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외의 전곡(錢穀)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고, 사사(使司)는 이를 삼사사(三司使)에 이첩하여 회계를 정밀히 조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하게 한다면 재정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놀고 먹는 관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건의를 올렸다.
왕은 상촌의 건의를 수용하였고, 바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후 상촌은 고려 태조(太祖)의 릉(陵)을 참배하기도 하고, 또 송악산(松岳山)을 찾아 유유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春風騫馬看山客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춘풍건마간산객
步步遲來萬樹陰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萬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보보지래만수음
澗畔林深無怪石 시냇가의 숲은 깊으나 괴이한 돌은 없고,
간반림심무괴석
장崖花落摠新禽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
장애화낙총신금
三盃酒氣論今日 석잔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삼배주기논금일
一曲松聲報古琴 한곡조 송성(松聲)은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주네.
일곡송성보고금
故國蒼茫如昨事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의 일과 같나니,
고국창망여작사
忠臣烈士共爭吟 충신 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충신열사공쟁음
상촌은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라고 하여 고려가 망하자 새로운 사람들이 지조 없이 날뛰고 있음을 개탄하고는 ‘충신 열사는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는다'
라고 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고 있다.
또 그는 부조현(不朝峴)에 올라서
忠臣烈士今安在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충신열사금안재
飛去山禽語古春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비거산금어고춘
玉階花心風後老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옥계화심풍후노
金陵樹色雨中貧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금릉수색우중빈
應知日短淸香閣 알괴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응지일단청향각
想必天寒觀德人 필시 관덕인(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상필천한관덕인
感淚振衣臺上客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감루진의대상객
此時幾泣我王身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
차시기읍아왕신
라는 시를 지었다.
상촌은 위의 시에서 ‘충신 열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라고 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토로하고 있다. 또 상촌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릉(陵)을 참배하고
修德就閒後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수덕취한후
臣維安獨歸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신유안독귀
榛령爲誰詠 진령(榛령)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진령위수영
葵藿自春開 규곽(葵藿)은 봄부터 피어있구려.
규곽자춘개
泣下風雲淚 풍운(風雲)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읍하풍운루
踏來塵劫灰 진세(塵世)의 겁회(劫灰)를 밟아 왔다오.
답래진겁회
侍陵將뢰酒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시릉장뢰주
北斗影徘徊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
북두영배회
라는 시를 지어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기리고 있다.
고려가 망할 무렵 桑村先生은 遺仗(유장)에 다음과 같은 詩句(시구)로 忠臣의 마음을 表現하고 있다.
桑村의 遺杖詩
平一疑雲 (고려말의 어지러운 시국을 말함)
평일의운
老當益壯 늙음을 맞이해도 더욱 장건할 것이며
노당익장
窮當益堅 궁함을 당해도 더욱 굳건하리라.
궁당익견
嗟爾吾與 슬프다! 너와 내가 더불어
차이오여
無替永年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무체영년
조선초 선생을 헌장으로 명하였으나, 상촌은 “나라가 망하니 忠義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平生에 忠孝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向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臣下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은 세우리 말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이어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忠孝),
평생충효의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금일유수지
一死吾休恨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일사오휴한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구원응유지
라는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후학(後學)인 황희(黃喜)는
有忠有孝難 충(忠)이 있으면서 효(孝)가 있기는 어렵고,
유충유효난
有孝有忠難 효(孝)가 있으면서 충(忠)이 있기도 어려운데,
유효유충난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어 가졌었건만,
이자기운득
황又殺身難 하물며 살신(殺身)의 어려움까지야.
황우살신난
라는 만사(挽詞)를 지어 先生의 殉節(순절)함을 哀悼(애도)하였다.
(이 글은 신천식 박사의 저서 桑村先生의 生涯와 思想 에서 발췌한 글임)
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김자수 선생 묘역 및 역사
상촌공 金자수의묘(경기도 기념물 제98호,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2012년 촬영)
金자수는 대사헌을 지낸 金영유의 조부이시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신도비(구 신도비는 뉘어져 보관되어 있음)가 있고 아래쪽에 사당이 있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은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사진과 같이 뉘어져 보관중이며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와비, 신도비, 순절비각 전체전경]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李穡(이색)이었고, 선생으로 朴尙衷(박상충), 鄭夢周(정몽주), 金九容(김구용), 朴宜中(박의중), 李崇仁(이숭인)이 있었다.
선생은 포은 다음으로 이어진 생려효자였다.
형이 벼슬살이로 나섰기에 자신은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살려 하였으나, 과거에 나서라고 하는 어머니의 명에따라 성균관에 들어가서, 머문 지 채 1년이 안 되어,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음을 알고 급히 내려가서는, 2년을 하루같이 어머님을 보살피며 약을 구하려고 헤메었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리며 효를 다 하였지만, 끝내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어머님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旌閭(정려)를 명하시고, 畵工(화공)에게 명하시어 出居廬圖(출거여도, 묘에서 여묘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와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侍墓洞(시묘동)'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
공민왕 22년에 효자로 정려가 내려지니 이른바 생려효자였다.
그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와비]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神道碑(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워놓았다 한다.
고려 말,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충청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 가셨다.
새 정부가 두문동을 불살라 버리자 선생은 향리 안동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그와의 친분을 고려하여 그를 대사헌으로 불렀으나,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방안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면서 나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다.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지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같이 죽는 것이 도리이다.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몸을 잃으면 무슨 낮으로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이윽고 그는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절한 후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내 장례식에 쓸 물품들을 챙기거라" 깜짝 놀란 아들이 되물었다.
"갑자기 웬 장례물품입니까?"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있다." 이윽고 감자수는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와비 2]
그의 아들 根(근)은 장례 때 쓸 물건을 챙겨 뒤따랐다.
성균관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정몽주 선생의 묘지를 참배 한 후 秋嶺(추령, 현재 대지산 준령인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갯마루에 서서 산천을 둘러본 후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 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뒤로는 스승인 포은 鄭夢周(정몽주)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것이다.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행적을 金石(금석)에 새기지 말라.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武人(무인) 투성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하는 말을 남기고 그는 '絶命詞(절명사)'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독약을 삼켜 자결하셨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 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상촌선생 순절비각]
상촌선생의 묘역은 김자수가 자결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묘역이 있는데, 묘역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에 있고, 묘하에는 고려충신 상촌 김자수선생의 순절비각이 서 있으며, 와비를 비롯하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輓詞(만사)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려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黃喜(황희)가 지은 '輓詞(만사)'이다. 상촌 김자수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셨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기도 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눞혀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金弘郁(김홍욱)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때 소현세자 姜嬪(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應旨上訴(응지상소, 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친국한 심문을 받던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라고 말할 정도로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으며, 추사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우왕 초에 正言(정언)이 되었는데, 그때 임금으로부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曺敏修(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는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하여 많은 군사를 죽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突山(돌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典校部令(전교부령)을 거쳐 判司宰寺事(판사재시사)가 되고 공양왕 때 이르러 대사성, 世子左輔德(세자좌보덕)이 되었다.
1392년에 判典校寺事(판전교시사)가 되었고 곧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경북 안동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순절 비각과 절명시 시비]
[상촌순절비]
이 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追遠齋(추원재)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한다.
안기동으로 이전하였을 때는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절명사 시비]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는 경주 김씨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세자좌보덕 등을 거치며 불교행사의 중지와 언관의 신분 보장 등을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상촌 선생 묘소]-옛날 사진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1352~1413)의 묘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石羊(석양)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金冠朝服(금관조복)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 장명등, 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라 한다.
[부인 우봉이씨묘소]
桑村先生遺杖 詩(상촌선생유장 시)
平一疑雲(평일의운)
고려말의 어지러운 시국을 말함
老當益壯(노당익장)
늙음을 맞이해도 더욱 장건할 것이며
窮當益堅(궁당익견)
궁함을 당해도 더욱 굳건하리라
嗟爾吾與(차이오여)
슬프다! 너와 내가 더불어
無替永年(무체영년)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이 시는 상촌선생이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지팡이에 남긴 것이다.
이 시는 상촌선생이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지팡이에 남긴 것이다.
[우봉이씨 묘소 앞 비석]
칠언절구 /金自粹(김자수)
憑虛樓次金少尹師古韻(빙허루차금소윤사고운)
빙허루에서 소윤 김사고의 운을 따라-桑村(상촌) 김자수
新樓壓水對靑山(신루압수대청산)
신루(憑虛樓)는 청산(永嘉山)의 물(주천강)을 마주하고
朝暮烟嵐?案間(조모연람궤안간)
아침저녁 아지랑이가 책상 사이에서 피어나네
幸有村庄?隔岸(행유촌장재격안)
다행하게도 언덕너머에는 시골집이 있으니
暮年投?共淸閒(모년투불공청한)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남의 여생을 즐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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