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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도

십청헌 김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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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32회 작성일 23-01-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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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김세필의 시무7개조항』

 

김세필 선생의 생애

 

김세필의 字는 공석(公碩)이며,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이라고 불렀으며,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은열의 후손이고,

검교태자태사공 김인관의 12대손이다.

 

김세필의 고조부 김자수는 고려 충신으로서 호는 상촌이며,

정언, 판사재시사, 충청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 겸 세자좌보덕,

판전교시사, 좌상시,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기거하다가

고향 안동으로 옮겨 신왕조에 항거한 고려의 유신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

 

증조부 김근(金根)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조부 김영유(金永濡)는 성종때의 명신으로서 이등공신이었고,

정 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김세필은 성종4년(1473)에 한성 명예방에서

통정대부 상의원 첨정 공조참판 김훈(金薰0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진천 송씨이고 군수 송학의 따님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할 뿐 아니라 밤을 세워가며 책을 읽음으로,

야순하는 군졸들까지 감명하여 이 댁에 앞으로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성종 21년(1490)의 임헌시에 많은 선비들이 시험을 보았는데,

김세필은 제일 나이가 적은 18세 소년으로 으뜸으로 장원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


성종은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함이 하도 기특하여

그 영특함을 확인할 뜻으로 친히 운자를 내렸다.

 

그 운자는 군(裙), 군(君),분(分)이었다.

 

장원급제자 소년 김세필은 그 자리에서 낙하시를 다음과 같이 지어 올렸다.

 

      진녀(秦女)가 처음으로 붉은 치마 만들어서,

 

      나그네 기러기 편에 낭군께 보내려했네.

 

      봄바람 만리 밖에서 불어오니 그 힘 알지 못한지라,

 

      붙여 보내려는데 어느새 갈기갈기 찢어지네.

 

 

이 시는 열녀전에 수록된 것으로,

진녀는 진의 두도의 아내이다.

 

양양에서 소식을 끊고 진수하는 남편에게

회문시를 보내 자기를 기억하게 했던 진천의 여자의 시이다.

 

성종은 이 시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며 상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18세의 소년이 임금 앞에서 즉석에서

글을 지어 올린다는 일은 보통 재주가 아니었다.

 

그것도 당당하게 옛날 진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지었다고 하는 것은

그 학문이 보통을 초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


김세필은 성종 21년(1490)의 臨軒試에 합격,

연산1년(1495)에 司馬試 생원과에 합격, 

연산2년(1496)에는 大科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2년간의 權知 생활을 마친후

연산4년(1498)에 정9품직인 종사랑으로 홍문관 正字로 임명.

 

2년후인 연산6년(1500) 4월에는

정7품으로 승진 務功郞으로 홍문관 博士 직역임. 홍문관 副修撰에 임명.

연산10년(1504) 3월에 사헌부 持平직을 맡아

言官의 역할을 담당.

중종1년(1506)에는 홍문관 副校理를 거쳐 敎理로 승진하였다.

 

중종2년(1507)에는 吏曹 正郞으로 관리의 任免을 추천하는 요직을 담당.

중종3년(1508)에 檢詳에 임명,

奉列大夫으로 승진하여 의정부 舍人을 맡았고,

 

11월에는 홍문관 應敎.

중종4년(1509) 종3품인 中直大夫로 승진 홍문관 典翰직을 맡았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5


중종5년(1510)에는 정3품관인 通訓大夫로

승정원 同副承旨 담당,

 

그해 8월에 드디어 堂上官인 通政大夫가 되고 홍문관 副提學이 되었다.

 

중종6년(1511) 1월에는 승정원 右副承旨 일을,

예조 參議에 임명되었다.

 

6월에는 사간원의 大司諫이 되어 간쟁의 최고 首長이 되었다.

 

중종7년(1512) 1월에 兵曹 參知일을 잠간 맡았고,

4월에는 다시 홍문관 副提學이 되었다.

이달에 승정원 右承旨를 거쳐 9월에는 중추부 첨지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처음으로 외직인 전라도 觀察使로 나갔다.

그 곳에서 土豪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등

괄목할만한 善政을 베풀었지만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6개월 만에 관찰사직을 사임하였다.

한달 후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종2품인 嘉善大夫로 승진되어 겸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중종9년(1514)에는 사간원 대사간 직을 다시 맡고,

중종10년(1515) 1월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광주목사로 두 번째 外職에 나갔다.

2년만인 중종12년(1517)에 광주목사를 사임하고 돌아왔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6


중종14년(1519)3월에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

4월에는 다시 겸동지성균관사가 되고

5월에는 이조 참판직을, 10월에는 예조 참판직을 번갈아 맡았다.

 

중종15년(1520)에는 세 번째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선생의 뛰어난 학식 때문에

1개월만에 성균관 同知로 복귀하여 경연을 전담하였다.

 

이해 경연 석상에서 “過則勿憚改” 대목에서

조광조의 죽음이 지나쳤음을 직언하다가

중종의 미움을 사서 충청도 음성으로 유배당하였다.

 

2년 후인 중종22년(1517)에 사면을 받아 방면되었고,

충주의 知非川에 소옥을 짓고 지비옹이라고

自號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중종23년(1528)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정2품직인 資憲大夫로 중추부 지사직을 받았으나,

곧 사은하고 충주로 내려갔다.

 

영조 22년(1746)에 정2품관인 정헌대부로 이조판서 직을 증직 받았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7

 

『김세필선생의 시무 7개조』

 

1495년 연산군 1년에는 사마시(司馬試:小科)에 급제하였고,

1496년 연산군 2년에는 만년 24세로 별시 문과(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해 11월 6일 조부 지중추부사 김영유(金永濡)가 별세하였다.

 

이 후 선생은 괴원(槐院:承文院의 별칭)을 거쳐 한림(翰林:弘文館관원)이 되었고,

 

곧 이어 옥당(玉堂:藝文館 檢閱)에 선입(選入)되었다.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선생은

1498년 연산군(燕山君) 4년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正九品)

경연전경(經筵典經)에 선보(選補)되었다.

 

1499(연산군 5)년에 김세필(金世弼)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겨울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을 다녀 온 일이 있다.

 

1500년 연산군6년에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正七品)에 제수 되고

홍문관 부수찬(副修撰:從六品)에 임명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8

 

지평 김세필(金世弼)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청풍으로 귀양가다.

 

1504(연산군 10)년 12월 2일 지평(持平) 관직에 있을 때

선생(金世弼)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두운 한 순간을 맞는다.

 

마침내 연산 10년 3월 29일에 지평 김세필(金世弼)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하여

장(杖) 80으로 결정이 나고, 4월에 청풍(淸風)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은  특별히 사형(死刑)을 감하여 정배되었다.

 

이 때 함께 사화(士禍)의 주동자로 연루(連累)되었던 권달수는 참형(斬刑)에 처하게 된다.

 

사형을 면한 십청헌(十淸軒:김세필(金世弼)의 호)은 용재(容齋:李荇의 호)선생과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된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화(士禍)의 순간이 지나고 이른바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9

 

새로운 임금 중종(中宗)의 명으로 풀려났고,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로 임명된 金世弼은 이제 착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로 한 가운데 홍문관 교리관직의 직무를 맡게 된다.

 

선생은 왕실(王室)에서 베푸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학자(學者)로 선택되어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기회를 접하게 된다.

 

이 때 선생은 중종(中宗) 즉위와 더불어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正4品)에 임명되고,

 

임금은 재주 있는 문사(文士)를 가리어

사가독서(賜暇讀書)자를 선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이 선발에서 선생이 으뜸으로 선택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0

 

이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우대(優待)하여

운영한 제도로서 수많은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사가독서자로 선발될 경우

이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이면서 장차 나라의 큰 인물로 키우겠다는

국왕의 의지가 담긴 영예로운 길이 보장되는 셈이다.

 

중종 2년에 이조정랑이 되어, 홍문관응교(종4품)와 시강관(侍講官)에 제수 되어

ꡔ大學ꡕ을 講論한다.

 

중종 4년 3월에는 조정에서 선생을 대마도 경차관으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선생이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므로 먼 곳에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다른 사람으로 개정하였다.

 

 

그 후 선생은 예문관 부응교가 되고,

이어 시강관(侍講官)으로서 ꡔ시전(詩傳)ꡕ을 강론하였으며,

홍문관 전한(典翰:正三品), 겸 예문관 응교가 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1

 

중종 5년 8월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고

부제학(副提學:正3品)에 제수 된다.

 

이 때 삼정승이 성리학에 있어

 

ꡔ중용(中庸)ꡕ과 ꡔ대학(大學)ꡕ을 선생에게 시강(侍講) 하도록

배려할 것을 임금께 추천함으로서,

 

바로 윤허되어 참찬관으로 시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이 때 임금은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강의를 마친

시강관(侍講官) 김세필(金世弼)에게 표피를 하사하고,

 

선생의 상소문(上疏文)에 대하여 칭찬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2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선생은

 

1510년 중종5년 12월8일에 임금의 정치강목으로서

시무 7개조항 (條項)을 건의하였는데,

 

첫째, 정치방법(政治方法)을 자세히 살피고,

둘째, 제사(祭祀)를 경건히 받드며,

셋째, 궁곤(宮閫)을 엄중하게 하며,

넷째, 종척(宗戚)을 화목하고,

다섯째, 사정(私情)과 허위를 물리치며,

여섯째, 민생(民生)을 불쌍히 여기며,

일곱째, 형옥(刑獄)을 신중히 처리할 것 등

 

많은 분량을 상소문으로 건의한다.

 

십청헌 김세필선생의 상소는

 

당시 절대왕권의 형옥속에서

백성들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억울함을 막기 위한

민주호소의 건의였다.

 

이는 한마디로 임금이 선(善)을 행하고

바른 정치를 하도록 상소한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3


특히 백성을 불쌍히 보살펴 줄 것과

형옥을 신중히 처리할 것을 강조한 점은

 

오늘날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발전에 밑걸음이 되는

선지자적(先知者的) 실천강목(實踐綱目)으로 볼 수 있다.

 

김세필의 시무 7개조 상소는

 

당시 중종 임금으로 부터 칭찬을 받게 되고,

그 건의로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새싹을 돋아나게 한

 

개혁적(改革的) 사상(思想)의 발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歷史的) 의미(意味)를 크게 부여할 수 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4


이러한 의미에서 상소문은 선생에 이어

더욱 더 구체화되는 내용으로 발전된다.

 

즉 심술(心術)을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열고,

 

편사(偏私)를 끊고,

 

사기(士氣)를 진작하고,

 

염치(廉恥)에 힘쓰고,

 

용인(用人)을 삼가고,

 

방본(邦本)을 굳히고,

 

사치(奢侈)를 억제하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시종(始終)을 삼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선생의 7개조 상소문중에 가장 두드러진 조항은

무엇보다도 사화시기(士禍時期)에 있어

 

국민의 신체의 자유와 직결되는 조항으로서

민생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형옥을 신중히 처리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이는 당시 봉건주의사회(封建主義社會)의 절대왕권에 제약성을 둔

국민의 기본권의 보장과 직결되는 내용으로서,

 

백성의 기본권의 하나인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생존권(生存權)을 주장한 점이 두드려진 내용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5

 

김세필은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교육개혁(敎育改革)에 대한 상소로서,

 

사람을 골라 사표(師表)로 임명할 것과

임금으로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과

그리고 신하(臣下)들의 도덕성(道德性)을 강조한다.

 

1510년 중종 5년 12월에 왕은 십청헌(金世弼)선생에게

「시문(詩文)」을 간행(刊行)하도록 명하고

김세필은 중종 6년에 우부승지(右副承旨)의 관직에 임명되고,

 

곧 바로 예조참의 사간원(司諫院) 대사간에 제수 되고,

계몽(啓蒙)편찬의 편저자가 된다.

 

무엇보다도 억울하게 모함(謀陷)당하는 백성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 할 것과 군비증강을 주장하고,

왕을 심야에 모시고 ꡔ주역ꡕ을 강론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6


십청헌선생은 1512년 중종 7년에

병조 참지(兵曹叅知)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의 직책을 맡고서

경연에서 ꡔ역경(易經)ꡕ을 강론한다.

 

선생의 강의는 임금의 도리에 있어

정도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고,

특히 기은(祈恩) 행사와 같은 사(邪)는 혁파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찬관(叅贊官) 우승지(右承旨)로서

중종 6년부터 7년까지 역경의 이치를 경연에서 강의할 때

어느 날 임금께서 하문하길,

“노양(老陽)과 소음(少陰)이 변천(變遷)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하매,

 

선생이 주역팔괘(周易八卦)의 괘(卦)를 빼니 임금이 자상하게 보았고,

선생은ꡔ周易ꡕ의 심오한 이치를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이때 임금은 특별히 명하여 경연(經筵)에서 다 기억하기 어려우니

저녁에 독대(獨對)하여 강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선생은 중종의 한학 선생으로 임명되어 저녁시간에

국왕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ꡔ주역(周易)ꡕ특강을 담당하게 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7


강의 도중에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적극 시행하도록 건의하였다.

 

“국가는 식량과 군사를 넉넉하게 가져야 적의 도발을 막을 수 있고,

장차 후한이 없게 될 것입니다.” 라고 아뢴다.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식량과 군비를 비축하자고

주장한 선생의 주장은 시기 적절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있은 지 불과 43년이 지난 뒤에,

왜구들이 전라도 달랑포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생의 선지자적(先知者的) 예언(豫言)이 적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592(선조 25)년에 왜구에 의해 전국이 초토화되는

참혹한 임진왜란을 당하게 된 역사의 현실에서 볼 때

선생의 주장은 선지자적 예견(豫見)이었다.

 

이는 율곡 이이선생이 주장한 10만 양병설(養兵說) 보다도

시기적으로 크게 앞선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선생의 깊은 의중을 당시 중종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7


선생이 제시한 군비비축의 유비론의 내용요지를 보면

 

“지금 군정(軍丁)이 매우 빈약(貧弱) 합니다.

이는 양민(良民)의 부역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가려내어

군정(軍丁)을 보충(補充) 한다면,

아마도 군사(軍士)를 넉넉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만에 하나라도 갑자기 전쟁(戰爭)이 일어난다면

공사(公私)를 따질 것이 없을 듯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뢴 것이다.

 

이러한 사록(史錄)은 오늘날 사학자들이 역사적 의미로서 재조명하여야 할 내용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8


○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요청하다

 

일본국 사신을 영접 위로하고서 조정에 들어온 때가

1512(중종 7)년 10월 20일이었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로 새로 임명된다.

 

그러나 선생은 상께 아뢰길, “관찰사의 직임도 중하지만,

신은 82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습니다.

 

신은 약 시중할 사람이 없으므로 감히 아룁니다.”고 사직을 요청하였고,

왕은 아뢴 데로 허락한다.

 

당시 사신(史臣)의 논평을 보면 매우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세필(金世弼)은 본래 까다롭게 살피는 성질로 처사가 잦았는데,

호남에 있어서는 자세히 하고자 힘썼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여,

간독히 책상에 쌓여도 능히 결재하지 못하였다.

 

비록 어미의 병을 핑계로 사직은 하였으나

실은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물의가 있을 것으로 우려하여

자신이 먼저 물려난 것이다.”고 평하고 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9


그러나 이 같은 사신(史臣)의 평은

평소에 사관(史官)의 일방적인 편견(偏見)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관찰사 직책은

가족과 더불어서 부임지까지 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제도상의 이유였다.

 

즉 홀로된 노모에 대한 자식된 도리의 효심에서

관찰사의 외관 직을 사직하겠다는 진솔한 효심의 발로이며,

 

다음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해 있을 때에

매우 잘 다스린 수령으로서

 

김세필(金世弼) 관찰사를 상께 아뢴 사실에서

선생의 사직요청은 그대로 접수되었다.

 

상은 이를 즉시 정상 참작하여 체직을 명하고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신(史臣)의 평은

평소에 사관(史官)의 일방적인 편견(偏見)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관찰사 직책은

가족과 더불어서 부임지까지 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제도상의 이유였다.

 

즉 홀로된 노모에 대한 자식된 도리의 효심에서

관찰사의 외관 직을 사직하겠다는 진솔한 효심의 발로이며,

 

다음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해 있을 때에

매우 잘 다스린 수령으로서

 

김세필(金世弼) 관찰사를 상께 아뢴 사실에서

선생의 사직요청은 그대로 접수되었다.

 

상은 이를 즉시 정상 참작하여 체직을 명하고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삼는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19


그러나 이 같은 사신(史臣)의 평은

평소에 사관(史官)의 일방적인 편견(偏見)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관찰사 직책은

가족과 더불어서 부임지까지 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제도상의 이유였다.

 

즉 홀로된 노모에 대한 자식된 도리의 효심에서

관찰사의 외관 직을 사직하겠다는 진솔한 효심의 발로이며,

 

다음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해 있을 때에

매우 잘 다스린 수령으로서

 

김세필(金世弼) 관찰사를 상께 아뢴 사실에서

선생의 사직요청은 그대로 접수되었다.

 

상은 이를 즉시 정상 참작하여 체직을 명하고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삼는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0


○ 광주목사(廣州牧使)재직시,

 

역학계몽의 난제를 풀기 위해 선생을 부를 때 역마로 달려와 풀이하다

 

1513년 중종 8년 11월에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에 오르고,

 

9년 12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에 임명된다.

 

이 때 좌의정 장순손은 왕에 아뢰길,

 

“김세필(金世弼)이 대사성(大司成)이 된 것은 사표(師表)에 적합하니

오래도록 재임하여야 그 효과가 크게 기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뢴다.

 

그리고 정광필 역시

김세필(金世弼)은 관찰사(觀察使)로 외직(外職)에 있는 것보다도

참 학자이므로 사표(師表)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아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1

 

그러나 1511(중종 16)년에는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가 있었는데,

 

상(上)께서 ꡔ역학계몽(易學啓蒙)ꡕ을 강하다가

이해하기 곤란한 데가 있자 알만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 때 어떤 신하가 대답하기를

광주목사(廣州牧使) 김세필(金世弼)이 잘 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상(上)께서는 즉시 일소(馹召)하도록 명한다4).

 

역마(驛馬)를 타고서 조정에 들어와서는

역학(易學)의 어려운 구절을 유창하고 명백하게 설명하니

상(上)께서 매우 훌륭하게 여기시고 탄복하였다 한다.

 

또한 청렴하고 정치 잘 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올리라는 명(命)이 있을 적에,

선생과 정성근 등이 여기에 참례되었다.

 

1517(중종 12)년에 한세환은

“김세필(金世弼)은 평소에 광주(廣州)를 잘 다스렸다”고 임금에게 아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2

 

○ ꡔ성리대전ꡕ 진강자로 선발되고, 선생을 시기하는 무리가 있다

 

1519(중종 14)년에 장례원 판 결사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조광조와 함께 제수 된다.

 

그러나 이때 선생의 학문은 최고의 달관(達觀)된 경지(境地)에 이르렀고,

높은 관직에 이르자 이를 시샘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추중(推重)하는 자들의 항의로 인하여 결국은 수습된다.

 

선생은 이때 ꡔ성리대전ꡕ을 진강(進講)할 학자 21인에 1차로 선발되었고,

 

그 중에서 특별히 강관(講官)을 가려 뽑으라고 명하였는데,

이 때 김세필(金世弼)이 11명 중 제일 선두에 발탁된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3

 

선생의 학문은 매우 넓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ꡔ주역(周易)ꡕ과 ꡔ중용(中庸)ꡕ을 더욱 좋아하였기 때문에,

 

전후 두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이 두 책에 대한 관련 서적을 많이 사 가지고 왔으니,

용공(用功)이 독실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광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講)한 것만 보더라도,

 

선생의 조예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은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양명(王陽明)의 문자가 우리 나라로 들어온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문자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선생은 일찍이 그것이 선학(禪學)에서 나온 것임을 간파(看破)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눌재(訥齋) 박상(朴祥)과 수창(酬唱)한 세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 모두가 선생의 학문이 높은 경지(境地)에 있음을 알기에 족하다고 하겠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4

 

○ 정조사 사은사로서 표를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온다

 

중종 14년 5월에 김세필(金世弼)은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제수 되었고,

정조사(正朝使)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표[정조 겸 발해 표류인 현계형등 사은사:正朝 兼 發回漂流人 玄繼亨等 謝恩使]를 받들고 경사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은 요동에서 북문의 화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소식인즉 11월에 조광조가 유배되었고,

12월에 죽었다는 소식이다.

 

일명 기묘사화가 일어 난 것이다.

마침내 남곤 과 심정이 사류를 전멸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다가 온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5


○ 기묘사화에 신진사류(新進士類)가 몰락하다

 

1519(중종 14)년 11월에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김정․김식․조광조 등의 선비들을 귀양보내고 사사시킨 사건이다.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甲子士禍)로 김종직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性理學)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 때 조광조는 김광필의 제자로서 곧장 6품 관직에 임명되었고,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5년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6

 

조광조는 1519(중종 14)년에 38세의 나이로 대사헌(大司憲)의 요직에 오른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고려이래 몇백년 동안이나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詩文)의 학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이행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되었으며,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전으로 고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정광필 등 보수파의 훈구세력과 서로 대립되었다.

 

불평이 팽만한 훈구파의 심정․남곤 등은

홍경주의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벗고 나선다.

 

희빈 홍씨는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대궐 안의 나무 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주며

「조(趙)가 왕이 된다」고 임금에게 충격을 주게 된다.

 

그리고 홍경주․남곤․김전․고형산․심정 등은 모의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밀고하게 된다.

 

마침내 중종(中宗)은 조광조․이자․유인숙․박세희․홍언필 등을 가두고,

조광조는 능주에 귀양가 사약받고 죽었으며,

 

김정․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살,

김구․박세희․박훈 등은 귀양을 갔다.

 

또 이 들을 옹호하던 안당은 2연후에 사형(死刑) 되었고,

김안국. 김정국형제도 파면되었다.

 

이 옥사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하며,

이 때의 사건과 관련되어 죽임을 당하였거나 귀양가 죽은 신하들 중에서

특별히 공이 큰 명신(名臣)에게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7

 

○ 기묘사화 직전 정조사로 나가고, 황해도관찰사에 제수 되다

 

선생은 기묘사화 직전인 중종 14년 10월 13일에 경사에 갔고,

돌아와 귀국 보고를 한 것은 이듬해 3월 20일 이었다.

 

그래서 조정내부의 정파대립에 가담할 틈도 없이

외교관의 임무 수행으로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기묘사화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무섭고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가운데 정조사로서 귀국보고를 아뢰었고,

 

왕은 선생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도록 분부하였다.5)

 

1520(중종 15)년 4월 23일에 선생이 황해도 관찰사로 멀리 부임해 있을 때 남곤 이

 

“김세필(金世弼)은 학덕이 높아 사표의 적임자입니다.

 

관찰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인재양성을 위해

조정에 돌아오도록 불러야 합니다”고 왕에게 건의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8

○ 성균관동지(成均館同知)에 제수 되다

 

임금이 이르기를, “감사(監司)도 워낙 중하나 학교(學校)는 더욱 중하니,

김세필(金世弼)을 성균관동지(成均館同知)로 갈도록 하라.

 

문(文)과 무(武)의 일은 모두 폐기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왕명은 선생의 학문이 높은 경지에 와 있음을 객관적으로 확인 해 주는 말이다.

 

모름지기 선생의 학문이 조금만 짧았더라면 아니면

남곤 이라는 자가 주청만 하지 안 했던들

선생의 생애에 후회는 없었을 것인데,

 

기어이 곧은 선생의 기품에서 조정의 문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봉황의 울음소리로 진리의 말씀을 임금에게 아뢰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즉, 선생은 부름을 받고 경연에서 ꡔ논어(論語)ꡕ 강독시간에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란 대목에 이르렀을 때 심히 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던 바,

 

여기서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라고 임금에게 잘못하였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당대 어떤 신하의 입을 통해서도 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선생의 이 한마디 말씀으로 인하여,

조정은 선생을 탄핵하는 상소와 여론으로 들끓게 되고

마침내는 추문을 받기에 이르게 된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29

 

○ ꡔ논어ꡕ강독 시에 “조광조 사사는 지나쳤다”고 아뢰다.

 

“여기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고,

고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본다.”하였습니다.

 

사람은 다 요순(堯舜)이 아니니,

어찌 매사에 진선(盡善)일 수 있겠습니까?

 

필부(匹夫)일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고치려고 생각해야 하는데,

더구나 온 백성의 위에 있는 임금이겠습니까?

 

임금이 잘못하고서 능히 고친다면 백성들의 우러러봄이

어찌 해와 달의 광명에 비길 뿐이겠습니까?

 

근래 조정(朝廷)에서 경화(更化)한 일이 많은데,

변경하더라도 어찌 죄다 알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5~6년동안 상께서 뜻을 기울여 잘 다스리려 하시매,

 

새로 사진(仕進)하여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옛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채용되게 하여

 

조종(祖宗)의 구법(舊法)을 변경하여 이로부터 어지러워졌으나

대신이 그 폐해를 보고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니

 

그 폐해는 상하가 괴리(乖離)하여 정의(情意)가 통하지 않아서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게까지 되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조정에서 처치하여 개변(改變)하였으나,

어찌 알맞게 하여 뒷 폐단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김세필 선생의 생애 ---30

 

조광조(趙光祖)는 새로 사진(仕進)하여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어찌 간사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학문이 모자라므로

마침내 나라의 일을 그르치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처음에는 총애가 비길 데 없다가

하루아침에 단연히 사사(賜死)하셨으니,

 

이 일을 사책(史策)에 써서 만세에 전하면

만세 뒤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신은 이 사람을 몰랐었는데,

접때 경연(經筵)에서 보니 사람됨이 경박하여

대신의 말일지라도 반드시 가로채서 제 마음대로 하므로,

신이 속마음으로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문관(弘文館)의 5~6품 줄에 두었고

육조(六曹)에 출입시켜 쓸만한가를 시험하였으니,

어찌 쓸모없는 재주였겠습니까?

 

잘못이 있거나 죄가 있으면 내쳐서 징계하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사사까지 하셨으니 지나칩니다.

 

김식(金湜)과 같이 간사한 자라면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겠으나,

 

조광조 같은 자야 어찌 간사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상께서 이것을 지나치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은총이 저러하다가 하루아침에 사사하셨으니,

일이 매우 참혹합니다.

 

미세한 죄수일지라도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후로는 조정(朝廷)의 기색(氣色)이 암담해질까 염려됩니다.

지우(智愚)의 신하가 있더라도

어떻게 안심하고 스스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김세필(金世弼)은 아뢰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1

 

○ 선생의 건의는 “봉황의 울음이었다”고 논평하다.

 

사관의 논평에 의하면,6) “조광조 등의 일은 지나치기는 하였으나

그 속마음은 간사하지 않았는데,

 

이제까지 한 사람도 쟁론(爭論)하여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뜻있는 선비들이 슬프고 분하게 여겼다.

 

김세필(金世弼)은 학문과 강개(慷慨)가 있어서

비로소 이런 논의를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봉황(鳳凰)의 울음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나,

하옥(下獄)되자 살기를 바라서 말을 바꾸었다.”

 

선생이 평소에 왕께 건의한 상소문을 보면

임금께서 선(善)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즉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신하의 건의를 가려서 판단하며,

 

형옥을 신중히 하도록 수차래 건의하였고

이를 상소문으로 건의한 사실에서 사관의 잘못된 기록임을 반증할 수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2

 

특히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에서

 

유자(儒者)의 사표(師表)가 된 막중한 선생의 위상(位相)을 보더라도 구차하게

살아남기 위한 번복의 글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십청헌(十淸軒) 선생의 행적 속에서

개인의 벼슬과 영광을 누리기 위한

 

그 어떤 술수를 부리거나 남을 모함한 일이 결코 없었으며,

오로지 학자의 고매한 외길을 걸으면서

 

청순한 마음과 곧은 선비정신으로 대나무 같은 기개(氣槪)와

지조(志操)를 지닌 성품으로 임금의 참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직언(直言)하다가 결국 두 번씩이나 죽음의 심판대에 올랐고,

마침내 사화(士禍)의 피해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불운(不運)한 생을 마친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3

 

○ 국시이정(國是已定)과 현난시비(眩亂是非)로 단죄 하다.

 

상(임금)이 이르기를,

“김세필(金世弼)이 재상 줄에 있으면서 오히려 이런 말을 하였으니, 나도 그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론 때의 일 때문에 추고까지 한다면 지나치지 않은가?”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전지(傳旨)를 내려 추고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상이 이르기를, “파직하여 징계하고,

또 후진의 선비가 김세필(金世弼)의 망령된 의논을 알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삼공이 또 아뢰기를, “재상 줄에 있는 자를 까닭 없이 파직하면

물의가 더욱 많아질 것이니, 추고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추고하지 말고 파직만 하려 하였으나,

 

참으로 그 그름을 아니, 반드시 추고해야 한다면 추고하도록 하라.”

 

김세필 선생의 생애 ---34

 

김전 등이 분부를 듣고 기쁜 기색을 나타내며 승지(承旨) 박호(朴壕)에게 말하기를,

“영공(令公)들은 전교를 기초하시오.”

하였다.

 

승지 윤희인(尹希仁)과 승지 김희수(金希壽)가 상의하여 전지(傳旨)를 기초하기를,

 

“전에 조광조의 죄상을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처치하였는데,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入侍)하여 강론할 즈음에

‘조광조를 늘 믿고 사랑하다가 하루아침에 사사하였으니 매우 참담합니다.

 

이를 거울삼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마음을 다하여 일하려 하겠습니까?

상께서 이 허물을 아십니까?‘ 하여,

 

재상 줄에 있으면서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지 않게 하였으니,

추문(推問)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분부하기를,

“그 ‘율문에 따라 처치하였다.’는 말 아래에 ‘국시가 이미 정해졌다[국시이정(國是已定)]’은 네 글자를 쓰고

 

‘재상(宰相) 줄에 있으면서’라는 말 아래에

‘시비(是非)를 어지럽혔다[현란시비(眩亂是非)]’는 네 글자를 써야 마땅하다.”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5

○ ‘삼공은 쓸모 없는 자’라고 사관이 논평하다.

 

“언로(言路)가 트이고 막히는 것은 나라의 보존과 위망에 관계되는 것인데,

 

삼공으로서 굳이 국문(鞫問)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니, 이른바 쓸모없는 자이다.

 

김전은 이때에 이르러 역시 이런 말을 하니, 지식 있는 사람들이

‘김전은 어두운 병폐가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마땅하다.”

 

“사관은 또 논한다. 말한 것이 잘못되었더라도 말한 사람은 죄줄 수 없으며,

말을 가리지 않고 아뢴 것도 임금을 믿기 때문이니,

 

위언(危言)하여도 죄주지 않는 것이 어찌 치도(治道)에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공이 김세필(金世弼)을 죄주도록 청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6

○ 왕은 ‘김세필(金世弼)의 벼슬을 갈 수 없다’고 하다.

 

대간(臺諫)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김세필(金世弼)이 감히 시비를 어지럽혔으니,

 

조옥(詔獄)에 내려서 국문(鞫問)하여 그 죄로 죄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필(金世弼)은 재상이다.

 

그러므로 다만 헌부를 시켜 추고하게 하였으나,

놀라운 뜻을 보이자면 조옥에 내려야 할 것이다.”

 

○ 치란으로 정론화하고, 재상이므로 신중을 기하도록 명한다.

 

소세량, “김세필(金世弼)의 한 마디 말은 치란(治亂)에 관계됩니다.”

남곤, “2품인 재상으로서는 조정과 뜻을 같이해야 하는데

상 앞에서 새로운 의논을 내었으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한승정, “다른 뜻이 없었다 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점점 버릇되어 사사로운 뜻을 두기에 이를 것입니다.”

 

소세량, “접때 나라의 일이 글러졌다가 이제 겨우 정해졌는데,

진언(進言)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남곤, “이런 때에 새로운 의논을 내서는 안 됩니다.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아뢰더라도 구제할 수 없고 더욱 어지럽게 할뿐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으니,

김세필(金世弼)이 아뢴 것은 조정이 함께 그르게 여기는 것이다.”

 

한승정, “김세필(金世弼)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으로 아뢴 것은 옳으나,

사사(賜死)를 지나친 일이라고까지 한 것은 그릅니다.

 

재상의 말과 아랫사람의 말이 같지 않은데 그런 말이 한 번 나오면

아랫사람이 함께 부화할 것이니, 반드시 그 죄를 사방에 환히 알려야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김세필(金世弼)은 재상이므로

역시 매우 그르다고 하겠다.”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7

 

○ 1520년 9월 21일 옥중에서 상소하는 글을 올리다.

 

“접때 경연에서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논할 때에

신은 ‘지식이 없고 경박한 사람을 차서에 의하지 않고

초탁(超擢)하여 은총이 뭇 신료(臣僚)보다 다르므로

 

기세가 날로 성해서 나라의 일을 어지럽히게 하였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반복하여 아뢸 즈음에

어세(語勢)가 어그러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게 사사(賜死)에 언급하였습니다.

 

신은 조광조와 나이의 장소(長少)와 벼슬살이의 선후가

매우 서로 달라서 조금도 서로 친분이 없으며,

 

신은 을해년 정월에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제수 되었다가

정축년 정월에 어미의 상(喪)을 당할 때까지

 

5~6년동안 외방(外方)에 있었는데,

조광조가 하는 짓을 듣고서 늘 몹시 통분하여 남들에게 개탄하였습니다.

 

기묘년 3월에 상을 마치고 조정에 벼슬하여

마침 조광조와 함께 경연에 모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의 언어 동정을 보고서는 경망하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며

상께서 총애하시는 것을 믿고 꺼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더욱 알았습니다.

 

신이 그때에 한 말씀으로 천의(天意)를 돌려서

나라의 일이 잘못되는 것을 구제하지는 못하였으나,

시비가 이미 정해진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조금이라도 현란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말이 한 번 그릇되면서 정상을 드러내지 못하여,

전에 조정을 염려하고 조광조를 개탄하던 마음을

끝내 성감(聖鑑)에 드러내어 아뢰지 못하고서 죄에 빠졌으니,

신은 억울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통찰하여

살려 기르는 은혜를 내리소서.”라고 상소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38

이 옥중 상소문은 본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성리학에 근본을 둔 한학자로서

당시 경연에서 ꡔ논어ꡕ를 강의해 오던 중 왕도정치를 구현하도록

 

시무 7개 항을 들어 상소 한 바 있고,

그래서 ꡔ논어ꡕ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항에 이르러

 

선생은 중종을 과오가 있으면 능히 고칠 수 있는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날의 조광조 사건이 지나쳤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신하된 도리로서 나라발전에 도움되는 정책적 사안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언급하였을 뿐이다.

 

둘째는 조광조(趙光祖)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은 결코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선생은 왕도 정치에서 인간의 생명을 중히 여기고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의 행동을 바로 해야 한다는

 

원론적 의미에서의 충언의 발로였음을 짐작 할 수있다.

 

셋째는 당시 영상 좌상을 비롯한 간신의 무리들이 선생의 충언을

사회혼란죄로 몰아 세웠고, 죽게 된다는 점이 너무나 억울해서

 

임금에게 자신의 정직한 본심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선생이 자신의 생명에 두려움을 느낀 그런 나약한 신하였다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 가지는 결코 않았을 것이다.

 

갑자사화 때도 선생은 연산군의 폭정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귀양을 택한 사실에서 사관(史官)의 논평이 잘못되었음을 반증 할 수 있다.7)

 

김세필 선생의 생애 ---39

○ 중종 15년 9월 21일 귀양지 음죽현 유춘역에 도배되다.

 

금부가 김세필(金世弼)의 죄를 장 1백 도 3년(杖一百徒三年)으로 조율(照律)하니,

 

공감 1등(功減一等:나라의 공이 있음을 참작하여 형벌에서 1등급을 감해 준다는 뜻, 장 90에 도 2년반으로 됨) 하고 속장(贖杖)하라고 명하였다.

 

그후 간신배들은 귀양간 김세필(金世弼)의 죄를 계속하여 논의한다.

 

중종15년 9월 28일 정응린이 아뢰길,

 

“김세필(金世弼)이 아뢴 것은 시비가 명백하고 사회혼란에 크게 관계됩니다.

 

상은 분부하기를,

“근래, 김세필(金世弼)이 재상반열에 있으면서

시비가 겨우 정해진 이때에 다시 그런 말을 하였으니

 

지극히 그르거니와, 이제부터는 시비를 한결같이 공정하게 정해야 한다.”

고 하고,

 

조방언이 아뢰길,

“김세필(金世弼)이 한말은 다스리는 도리에 해가 되므로

좌우의 시종이 그 잘못을 탄핵해야 마땅할 터인데도

그러지 않았으니 지극히 그릅니다.”고 아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0

십청헌 선생이 유배된곳은 당시 음죽군인데,

지금은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이황리이다.

 

선생은 1523년 중종 18년 2월에 유배에서 풀려나는데,

이는 임금께서 ꡔ논어ꡕ의 “과즉물탄개”란 구절을 읽다가

 

문득 3년 전 김세필(金世弼)의 모습이 떠올라 그를 유배에서 풀게 한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다시 임명한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사임한다.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 영남을 가다가 유념해 두었던 곳이 있었던 바,

그곳으로 낙향하였다.

 

그곳이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 성리이다.

그 당시는 인가가 없이 갈대만 우거진 빈들이었다.

 

거기다 초가집을 짓고는 앞 시내를 지비천이라 이름하고,

동리 이름도 지비촌이라 하였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1

 

이때 선생의 나이가 50세였다. 선생은 이곳에서

‘행년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라 하시며,

후학들을 교육하기 시작한다.

 

이는 공자(孔子)의 제자 거백옥으로 부터 연유한 것임을,

선생이 권상공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시에서 알 수 있다.

 

만축차허리(晩築此虛里)  

늙게 야 이 마을에 집을 지었는데

 

문명의가지(問名義可知)   

이름을 보아 뜻을 가히 알겠지

 

고아비거씨(顧我非遽氏)  

나는 거백옥은 아니지만

 

절미사소위(竊美斯所爲)  

이분이 하는 일 좋아서 본받았도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2

○ 중종 19년 7월 4일, 김세필(金世弼)선생에게 직첩을 환급하려 하였다.

 

이는 홍문관 부제학이 상차 하여 직첩의 환급을 극렬 반대하였으므로,

이에 도로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간당(奸黨)들이 이렇듯 여러 해를 두고 선생에 대하여

환급(還給)을 극구 저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538(중종 33)년 4월 12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세필(金世弼)에게 직첩을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는 선생께서 하세(下世) 하신 후이다.

 

선생은 1533년 중종 28년 9월 5일 61세로 졸(卒)하니

 

당신이 생존시에 택지 했던 선영(先塋)인

지금의 용인시 수지면 죽전리(대지)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찬(撰)한

선생(先生)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의 비석(碑石)이 새워져 있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3

 

○ 현종 13년 3월 27일 충주 선비 한치상이 편액을 청하니 허락하다.

 

김세필(金世弼)을 재향(祭享)하는 충원의 사림(士林)들이

충주에 팔봉서원을 세우고 서원에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청하니,

이 소장은 예조에 내려졌다.

 

현종 13년11월2일 고(故) 참판(叅判) 김세필(金世弼)등의 서원(書院)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편액(扁額)을 내리고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김세필(金世弼)의 자손들은 충주(忠州)에 많이 살았다.

 

○ 영조 22년 9월 6일 김재로가 기묘명현에게 시호내리기를 청하다.

 

“지난번 기묘명현(己卯名賢)들에게 모두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만,

허다한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다 시호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시호(諡號)를 내려야 할 김세필(金世弼)은 학문과 명절이 특이한 만큼,

해조로 하여금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4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선생의 사상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선생은 무엇보다도 공평을 신조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호소할 데 없는 약자 편에 서서 억울함이 없도록 억울함을 당한 자를 찾아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대사헌(大司憲)때 그 명성이 매우 높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때에는 남원의 3호족(三豪族)의 민폐가 특히 심하였으나 그 세력이 강대함으로 해서 감히 손을 대는 관원이 없었는데 선생이 이를 바로 잡아 그 발호를 억제한바 있으며,

 

재임 중 모친상(母親喪)을 모실 때에 관청(官廳)의 물건을 조금도 쓰지 않았다고 당시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가 늙은 어버이를 위해 수령(首領)으로 나갔던 광주목사(廣州牧使) 김세필(金世弼)에 대한 보고에 ‘염근봉공(廉謹奉公)’이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광주(廣州)의 사대부(士大夫)인 세도가(勢道家)들이 부역을 기피하게 되자 선생이 공평(公平)하게 부과하여 칭송이 자자했던 반면에 일부 권력부호계층으로부터 환심을 사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게 될 때 광주목사(廣州牧使)시절의 공로(功勞)가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광주토호(廣州土豪)들의 부역에 관한 불평으로 모함(謀陷)도 있었으나 선생의 행적이 너무도 깨끗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 하였기에 그들의 모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5

 

선생은 중국을 두 번씩이나 사은사(謝恩使)로 왕래하면서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송(宋)․원(元)․명(明) 고유(高儒)들의

서적을 많이 가져와 당시

조선의 성리학(性理學)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심오(深奧)한 학문이 바탕이 되고

청렴(淸廉) 각직(閣直)한 성격이 그 행동의 추진체가 되어

 

정치(政治)․외교(外交)․교육(敎育)․군사(軍事)․사회(社會) 등

각분야에 걸쳐 소신껏 추구(追求)함으로서

많은 치적(治積)과 성과(成果)를 올리었다.

 

그러나 시류(時流)와의 거스름으로

선생은 두 차례의 유배(流配) 생활 등

많은 정치적 시련(試鍊)을 겪어야 했으나,

 

그로 인하여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의 열의(熱意)는 식을 줄 몰랐다.

 

김세필 선생의 생애 ---46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내직에서 외직인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있을 때,

유생(儒生)뿐만 아니라 삼공(三公)과 반대세력인 남곤 까지도

 

“김세필(金世弼)만이 성균관동지(成均館 同知)로서 그 사표(師表)의 최적임자”라고

상소한 사실에서

 

김세필(金世弼)의 학문의 경지(境地)가 과연

얼마나 높았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의 상소문 중에 휼민생(恤民生) 신형옥(愼刑獄)등 항편을 살펴보면

인(仁)을 바탕으로 한 민본주의(民本主義) 정신을 행정(行政)의

기본(基本)으로 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선생이 당시 나이 50세로서 지난날을 회상(回想)하며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수양(修養)과 후학들의 교화(敎化)에 힘쓰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도

 

어쩌면 사화(士禍)시대에 처하여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를 일이다.

십청헌 선생의 높은 뜻을 감히 헤아려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利害)와 감정(感情)을 초월하여

성경(誠敬)과 덕성(德性)을 갈고 닦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하나의 큰 각성(覺醒)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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