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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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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5회 작성일 22-12-3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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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 ♣

 

 

김정희 金正喜

조선국 승문원 검교(朝鮮國 承文院 檢校)

임기:1722년 3월 1일 ~ 1723년 1월 8일

군주:조선 순조 이공

신상정보

국적:조선

출생일:1786년 6월 3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

(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사망일:1856년 10월 10일 (향년 71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

(現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학력:1819년 순조 19년 문과 급제

경력:성리학자, 실학자, 고증학자,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정당:노론 벽파 잔존 후예 성향 북학파 세력

부모:김노영(양부)

남양 홍씨 부인(양모)

김노경(생부)

기계 유씨 부인(생모)

배우자

초배 한산 이씨

계배 예안 이씨

측실 한씨

자녀

김상무(양적자)

김상우(서자)

친인척

김이주(친조부)

김노성(친숙부)

별명

호(號)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조선 충청도 예산 출생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

조선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다.

주요 이력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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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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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 ♣

 

청소년기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1년 후 1801년, 생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된다.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 추사 김정희 ♣

 

학문과 사상 형성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의 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와 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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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상촌,추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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