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김영전
페이지 정보

본문
김은, 김추 두 형제가 가정에서 법도를 세운 각계촌(覺溪村)
고려 충신 상촌(桑村) 김자수(金子粹)의 맏손자인 판관(判官) 김영년이 이곳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경주김씨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편집자주>

▲ 선지당(충청북도기념물 제41호(1977년지정). 김자수(고려말 형조판서)충청도관찰사로 있을때 그 손자(영년)과함께 살던곳)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382번지
충청북도영동(永同)계산현(稽山縣)서쪽각계 촌(覺溪村)에 김은, 김추 형제가 살고 있었다. 각 계마을은고려충신상촌(桑村)김자수(金子粹)의 맏손자인판관(判官)김영년이이곳에서태어나면 서부터경주김씨의집성촌(集姓村)을이루게되었 다.이곳의 지형은 활 모양으로 앞에는 맑은 냇물 이 흐르고, 뒤에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여 있어 서 유학자들이 풍류를 즐기기 좋은 곳이었다. 이 곳에는또한난계(蘭溪)박연(朴堧)의사당이있으 며,영년의처도밀양박씨(密陽朴氏)박연의일족 이었다.상촌선생의충효(忠孝)의맥이이곳각계골에이어진것은바로김은,김추의효행(孝行)때 문이다.
은의 호는 일성재(日省齋)이고 전주최씨(全州 崔氏) 윤구(潤球)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추 (樞)의 호는 회려(晦廬)요, 연일정씨(延日鄭氏) 징 (澄)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숙종 조에 두 분이 같이효도로정려(旌閭)를받았으며,호조좌랑(戶 曹佐郞)에추증(追贈)되었다.두분의조상중에는 고려 말의 효자이면서 충신인 상촌 김자수(金子 粹)가있다.상촌은태종조에형조판서(刑曹判書) 로 불렀으나 추령(秋嶺)에서 자결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상촌은 충효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곳 충 효사(忠孝祠)에 배향(配享)되었다.상촌의 아들 김 근(金根)은 평양소윤(平壤少尹)을 지냈고, 병조판 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상촌의 손자 김영 년은 강릉판관(江陵判官)으로 처음으로 영동(永 同)에 살게 되어 이곳이 경주김씨 상촌공파(桑村 公派)종가(宗家)의터전이되었다.상촌의증손자 김강(金剛)은생원이었고,그의아들김맹견(金孟 堅)은부사직(副司直)을지냈다.
김강의 아들 김경(金涇)은 생원으로서 은거하여독서에만전념했다.이분이김은,김추의고조 이다. 증조 김효성(金孝誠)은 공조참의(工曹參議) 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김건(金鍵)은 동지중추부 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김여 호(金汝湖)는오래살아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事)를받았다.어머니는밀양박씨(密陽朴氏)효성 (孝成)의따님으로1649년(인조26)정월4일에김 은과김추를낳았다.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맛있는 음식이있으면반드시가지고와서부모에게드렸 으며, 장성해서는 가난하여 아내와 자식을 돌볼수없으면서도일념으로부모를공경하고부모의 뜻에어긋날까걱정했다.
두 형제는 부모를 번갈아 모시면서 잠시도 곁 을 떠나지 않았고, 부모를 받들기를 겨울에는 따 듯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했으며, 집안의 세 세한 근심스러운 일은 부모가 알지 못하게 했다. 1671년(현종12)에어머니가위독해지자두형제 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과 섞어서 드리니 깨어 나수개월이지난뒤에돌아가셨다.
그리고1694년(숙종20)에아버지가병이들어 몇달이지나도낫지를않다가어느날아침에갑 자기심해지자형제는또한저번에자르지않았던 손가락을 마저 잘라 피를 마시게 하니 비록 효험 은 보았으나 한 달 남짓만에 돌아가셨다.부모 장 사때에는한결같이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따 랐다.형은궤연을받들고돌아와집에서우제(虞 祭)를지내고,아우는초막을짓고묘를지켜한걸 음도산밖으로나오지않았다.
▲ 효자비각 (선지당내)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또 슬플 때마다 곡을 하니지팡이를짚던땅이몇촌(寸)이나깊어졌으 며,절하고앉던곳은풀이나지않았다한다.항상 하나의표주박에물과콩가루를섞어마시고놋쇠 그릇을쓰지않았으며,훈채를먹지않았다.비록 무더운더위라도머리띠와허리띠를풀지않았으 며,자식이병들어도돌보지않았고,아내가병들 어도문안하지않았다.

▲ 영모당 (100미터정도 산위에 있었는데 1986년 이속에 신축하여 현재 음10월10일 묘사를 지내고 있음)
집에비가새고무너져도돌보지않았으며,오직애통한마음으로삼년을지냈다.역대로부모 상에 누군들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렇 게효도한사람이몇이나될까? 공(樞)의여막(廬幕)근처에는뱀이많이살았는 데공이거처하면서부터뱀이없어졌다. 꿩과 토끼가 와서 놀면서 사람을 보고도 피하 지않아마치집에서기르는가축과같았다.또한 묘 앞에는 샘이나 우물이 없어서 시내 물이나 계곡물을기러와야했는데갑자기여막아래샘물 이솟아나오다가공이철수하자샘이말라버렸다 한다.
▲ 교지(영모당내에 부착되어 있음)
이에 원근의 공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 고, 친척들도 달려와 도왔으며, 이웃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이 문안하고 음식을 보내오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명저(李明著)라는 본고을관리도특별히상을내리고,몸소찾아가 위로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제수(祭需)를 보 냈다고 한다.공은 삼 년 동안의 여묘살이에 쇠약 해져서쓰러질것같았지만정신력으로버텼으나 복(服)을 마칠 무렵인 1697년(숙종 23) 윤 3월 5 일에세상을떠났으니향년(享年)50세였다.이해 10월에아버지무덤아래서남쪽(艮坐)언덕에장 사지내니유명(遺命)에따른것이다.1714년(숙종 40) 각계촌(覺溪村)에 상촌(桑村)의 별묘(別廟)가 있고편액(扁額)을충효사(忠孝祠)라했는데온고 을의공의(公議)가모두공의형제가능히상촌의 효를계승했다고해여기에함께배향(配享)했다. 그리고1721년(경종1)에김은,김추두형제에 게국가로부터정려(旌閭)가내려졌다.김은은경 조(慶祖),경원(慶遠),경래(慶來),경뢰(慶賚)의네 아들을, 김추는 경초(慶初), 경유(慶裕), 경연(慶衍),경희(慶禧),경신(慶新)의다섯아들을두었다. 경조, 경원, 경뢰는 숙종 조에 효성(孝誠)으로 급 복(給復)을받았고,경연은1715년(숙종41)에문 과에급제해영조때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지냈다.
그는경종초에소론(少論)김일경(金一鏡)을배 척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이 상촌으로부터400년동안후손들이충효를계승 해와서오늘날까지가문을빛내왔다. 그리하여가문에서는어른을공경하고,제사지 낼 때 정성을 다하며 정결함을 중히 여기고 풍성 함을귀히여기지않는풍조가생기게되었다. 또한재물을탐내지않고,여색을멀리하며,살 생을 즐기지 않는 기풍이 생겼다. 남과 다투기를 좋아하지않고관원(官員)의장단(長短)을말하지 않으며,부인의말을따르지않고,화나면반드시 어려울 것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 두가김은,김추두형제가가정에서법도를세운 까닭이다. 부모 자식이 연이어 아름다운 덕과 행실을 계 승하니(聯芳襲馥) 궁벽한 시골에 그 덕과 행실이 아울러빛나도다.이어찌상촌선생의큰덕을이 어받은것이아니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