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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찾기와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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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8회 작성일 23-01-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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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족보의 역사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해 온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 종에 13,000여 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족보의 기원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 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 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이라고 하는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족보의 종류

 

1.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하여 만든 족보책이다.

 

2.족보族譜, 종보宗譜 - 본관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족보책으로, 한 가문의 역사와 집안의 계통을 수록한 책이다.

 

3.세보世譜, 세지世誌 - 한 종파 또는 그 이상이 같이 수록되어 있거나, 한 종파만 수록된 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파보派譜, 지보支譜 -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 종파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들 파보에는 그 권수가 많아 종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는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증가되어 가고, 그 표제에 연안김씨파보, 경주이씨 좌랑공파보, 순창설씨 함경파세보 등과 같이 본관과 성씨 외에 지파의 중시조명 또는 집성촌,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과 형식에서는족보와 다름없다.

 

5.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수록하되, 시조로부터 자기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 전설,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족보 편찬의 기본이 된다.

 

6.계보系譜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씨족 전체 또는 한 부분만을 수록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 편찬된 형태, 내용에 상관없이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등과 같이 조상 중 충, 효, 절, 의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내시) 사이에도 계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있다.

 

[출처] 한국 족보의 역사|작성자 바람소리



 

동양 족보 族譜

 

일족(一族)의 세계(世系) 및 관련 사실의 기록물을 말한다. 족원(族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며, 후대로 갈수록 그리고 일족[종족 또는 가족, 중국학자들은 집단화된 개별 가정(한국, 일본의 가족)을 종족이라고 하고, 가정과 종족을 통합해 가족이라고 하는 예가 많다. 여기서는 한국의 용례로 쓸 때는 가족, 중국의 용례로 쓸 때는 ‘가족’으로 구분해 사용함]이 발전할수록 내용이 풍부해지고 체계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당대(唐代) 이전에 보(譜) · 세보(世譜) · 가첩(家牒) · 보첩(譜牒) · 가보(家譜) · 종보(宗譜) · 족보(族譜) 등의 명칭이 등장했으며, 송대(宋代) 이후에는 점차 종보 · 족보 · 가보가 구별되지 않고 쓰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명칭을 통칭하고자 할 때 일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족보’가 비교적 포괄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족보 명칭에 성씨 · 지명 · 군망(郡望) · 당호(堂號) · 편찬차수 등이 포함되지만, 생략되는 예도 많다. 현존하는 중국의 족보는 수만 종으로, 재질[갑골, 청동, 돌, 탑, 끈, 간독(簡牘), 종이 등], 인쇄 여부[각본, 필사본], 편찬 순서[선수(先修)와 후수(後修)], 편찬 주체[관수(官修)와 사수(私修)], 기록 범위[지보(支譜) · 방보(房譜), 종보(宗譜) · 세보(世譜), 대성보(大成譜) · 종세보(宗世譜) · 통보(統譜) · 총보(總譜), 합보(合譜) 등], 신분[옥첩(玉牒), 세가보(世家譜) 등]에 따라, 그리고 시대적 변천, 종족의 발전 정도, 지역적 차이 등에 따라 명칭뿐만 아니라 형태, 형식, 내용도 다양하다.

 

상 · 주대(商周代)의 족보는 갑골이나 청동기에 세계(世系)를 기록한 단순한 형태였으며, 왕실을 비롯해 제후나 일반 귀족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특권 유지에 활용했다. 춘추전국시대에 기존의 특권 집단이 소멸하면서 이들의 족보도 사라졌지만, 진 · 한 제국의 성립과 함께 전문기구를 설립해 황친 및 귀족의 보첩을 편찬하고 관장하도록 했다. 또 호족이 성장하면서 사인의 족보 수찬도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세계와 소목(昭穆)을 밝히고 생졸, 관작(官爵), 자호(字號), 장례지 등을 기록한 비교적 간단한 형태였다.

 

조위(曹魏)에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실시한 이후 문제(門第)와 족망(族望)이 더욱 중시되면서 족보는 관원 선발, 임관(任官) · 면역(免役) 특권의 보장, 혈통 · 신분 · 문벌의 보증 등에 활용되었다. 이에 정부는 보국(譜局)과 보고(譜庫)를 설치해 족보를 관리하고, 군성보(郡姓譜) · 주성보(州姓譜) 등을 편찬했다. 보학(譜學)이 발달하고 보학세가(譜學世家)가 등장했으며 많은 족보가 편찬되어 양(梁)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 목록에는 42종 422질 1,064권을 들고 있으며, 족보 지식이 사회적으로 꼭 알아야 할 교양과 상식이 되었다.

 

구품중정제가 폐지되고 과거제가 시작된 수 · 당대에도 사회적으로 문벌이 중시되었으므로 여전히 족보가 정치, 사회생활, 혼인 등에서 중요했다. 특히 당대(唐代)에는 정부가 『씨족지(氏族志)』 · 『성씨록(姓氏錄)』 등을 편찬해 성씨의 고하를 평정하는 등 통치에 적극 활용했고, 개인도 『하남우씨족보(河南于氏家譜)』처럼 족보를 편찬해 자기 일족의 위상 제고를 꾀했다. 이에 보학이 발달하고 족보 편찬도 융성했는데,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의 불완전한 기록에 따르더라도 당말 및 오대 전란을 거치고 남은 각종 족보가 1,000여 권에 달할 정도였다.

 

송대는 중국 족보의 역사에서 전환기이다. 당말 전란과 왕조 교체로 인해 귀천의 부침이 심하고 귀족의 특권이 사라지자 보학과 족보에 대한 관심이 급감했으며, 과거제도의 발달로 관리 임용이나 혼인에서도 문벌이 중시되지 않게 되어 황실의 옥첩(玉牒) 이외의 족보 편찬은 쇠퇴했다. 그러나 과거제도와 균분상속 및 상업화의 진전으로 정치 · 사회적 특권과 부의 상속이 어려워진 사대부들은 종법 부활에 힘썼으며, 구양수(歐陽脩)와 소순(蘇洵)은 새로운 족보 찬수 원칙과 구체적 방법 및 체례(體例)를 제시해 이전과 다른 형식의 족보를 사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양수는 족인과 자손이 조상의 유덕을 이해하도록 사서(史書)의 체계와 도표(圖表) 방식을 채용해 가족의 이동 · 혼인 · 관직 · 봉호(封號) · 이름 · 시호(諡號) · 향년(享年) · 묘장(墓葬), 각종 행사 등을 수록한 새로운 형식의 도보(圖譜)를 만들었다. 이들의 제안은 ‘구소보법(歐蘇譜法)’으로 불리며, 이후 족보의 표준으로 존중되고 모방되었다.

 

또한 성리학의 유행으로 존조(尊祖) · 경종(敬宗) · 수족(收族)과 교화 기능이 중시되면서 족보 편찬도 더욱 확산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지만 남송대에 만들어진 족보가 북송대의 5배이며, 원대의 그것이 남송대의 4배라고 할 정도로 수보 풍조가 성행했다. 원대에는 송대의 수보 풍조를 계승하고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민족 통치하에서 수족(收族)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세계가 5대를 넘어서 심지어 50대, 70여 대까지 소급하는 족보가 나타났다.

 

명 · 청대는 중국 족보의 완성기이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중국 족보는 이 시대의 것이며, 체례나 내용이 완비되었다. 특히 명 중기 이후는 인구증가와 자원부족, 상업화와 사회적 유동성 심화, 각종 분쟁과 반란의 빈발 등으로 인해 종족의 결집과 상보(相保) 기능이 강조되면서 족보 편찬에서도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내용이 풍부해지고 형식이 유형화 · 일반화되어 갔다. 수록된 내용은 크게 족보 편찬 배경 · 경과 및 원칙[서(序) · 발(跋) · 범례 등], 성씨와 종족의 연원 및 혈연관계[세계(世系) · 세표(世表) · 연원기(淵源記) · 지파기(支派記) 등], 영예스런 인물 및 관련 문헌[고칙(誥勅) · 상찬(像贊) · 등제기(登第記) · 사환기(仕宦記) · 묘지기(墓誌記) · 문원(文苑) 등], 제사와 분묘 관련 기록[분영기(墳塋記) · 사당기(祠堂記) · 제문(祭文) · 사규(祠規) 등], 종족의 규범[가훈(家訓) · 종약(宗約) · 족약(族約) · 족규(族規) 등], 종족의 공유재산[사산(祠産) · 제전(祭田) 및 관련 문서 등], 주요 사건 기록[소송 문서 등], 기타 종족 활동에 필요한 자료[주자가훈(朱子家訓) · 주자제의(朱子祭儀) · 오복도(五服圖) 등] 등이다. 이런 내용은 족보 편찬의 기본 형태로 정착되고 종족들이 서로 모방하면서 일반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고 확산되었다.

 

둘째, 통합족보[통종보(統宗譜) · 회통보(會通譜) · 대성보(大成譜) · 종세보(宗世譜) · 통보(統譜) · 총보(總譜) · 대동보(大同譜) 등]가 출현하고 확산되었다. 명 중기 이후 각지에 분포한 많은 종(宗) · 지(支)를 하나의 족보에 통관하는 통종보 혹은 회통보가 출현했으며,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어 적으면 몇 개, 많으면 수백 개의 지파가 통합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수보(修譜)가 일반화되고 소규모 족보가 많이 편찬됨으로써 통종보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대종법(大宗法)이 보편화되면서 몇십 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고제왕(古帝王) 혹은 명인(名人)을 선조로 정했으므로 공통 조상을 확정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적 유동성과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종족 확대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엄격한 혈연적 정체성이 이완되면서 동성(同姓)의 현실적인 공통 이해가 더 중시되었던 것과도 관련 있다.

 

셋째, 가법(家法)[족규(族規) · 종약(宗約) · 족약(族約) · 종규(宗規) · 가규(家規) 등]과 국법 수록이 일반화되었다. 가법은 족인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시조의 자애와 자손의 경애를 주축으로 하는 윤리성 및 족(族) 내의 질서와 이익 보증이란 현실적 필요성을 기초로 성립되었으며, 족인생활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가법은 국법과의 조화를 전제로 육유(六諭)와 같은 황제의 유지(諭旨)나 법률을 포함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높이고 일족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결과 족보는 단순한 계보의 기록을 넘어서, 읽고 지켜야 할 일족의 일상생활 규범이자 국법의 구현체가 되었다.

 

넷째, 족보 편찬의 주체가 서민까지 확산되었다. 경종(敬宗) · 수족(收族) 관념이 확산됨에 따라, 사대부 · 신사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족보를 편찬해 일족을 결집시키고 그 뿌리와 조종의 덕을 잊지 말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 세역과 방위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나 공유재산의 증가에 따라 구성원의 인지 수단으로서 족보가 중시되면서 편찬자의 외연이 더욱 확대되었다.

 

다섯째, 족보 편찬이 체계화되었다. ① 일반적으로 초수(初修) 족보는 각종 수고(手稿) 자료에 기초하여 일부 지파가 주도해 만들기 때문에 수록되지 못한 지파가 생기고 내용도 불완전하지만, 재수 · 삼수 족보에서는 수록 범위와 내용이 충실해지고 ‘삼십년일수(三十年一修)’와 같은 편찬 주기가 명시되었다. ② 족보 편찬이 발의되면 족장이나 원로가 중심이 되어 편찬위원을 정하고 보국(譜局)과 같은 조직을 구성해 족보 편찬을 시작했으며, 완성되면 주수(主修) · 편차(編次) · 참열(參閱) 등의 직장(職掌)과 담당자의 이름을 족보에 기록했다. ③ 보통 수십 개의 항목에 달하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편찬 범례는 명 · 청대 족보의 특징으로 족보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준이 되었다.

 

④ 편찬 비용은 족전의 수입, 지파별 분담, 유력자의 기부, 입보(入譜) 내용과 양에 따른 부과 등에 의존함으로써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되었으며, 기부자의 명단은 대부분 족보 말미의 연명록(捐名錄) 등의 형식으로 명기되었다. ⑤ 일반적으로 편찬자는 족(族) 내에서 종족 의식이 강한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도하지만, 명망 있는 외부 인사에게 족보 편찬을 의뢰함으로써 족보의 위상이나 문장 수준을 높이기도 했다. ⑥ 족보 편찬은 일족 중에서 유력 인사나 명망가가 있을 경우 자료 수집이나 비용 확보가 용이해 비교적 쉽게 편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거나 또는 전란기에는 자료 수집이나 재원 확보는 물론 입보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편찬 주기조차 지키기 쉽지 않아서 100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속수(續修)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명 · 청대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발전은 이 시기 족보 편찬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유럽 문물의 도입 및 각종 개혁, 청조의 붕괴, 전통과 유교에 대한 비판 및 근대국가 건설 노력이 진척되면서 족보 편찬에도 서서히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예컨대, 일부 종족은 족보 편찬의 정당성을 민족과 근대국가 건설 및 애국주의에서 찾고자 했고, 종족을 중시하는 손문(孫文)의 언설을 수록하였다. 또 과거제도의 폐지와 같은 정치 · 사회적 변화로 선거지(選擧志) · 등과기(登科記) 등이 사라지고 ‘신사지(紳士志)’나 ‘필업생표(畢業生表)’ 등이 등장하는 등 체례상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남녀평등의 원칙이 적용되어 족보의 내용이 풍부해졌다. 이 밖에도 활판이나 오프셋 같은 근대적 인쇄 방식의 도입으로 쪽수는 적지만 구성이 다양해지고 많은 내용을 수록할 수 있게 되어 족보 출판이 대중화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대륙에서는 족보를 봉건 잔재로 규정하고 편찬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족보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그러나 홍콩 · 대만 · 싱가포르 등에서는 지속적으로 많은 족보를 신편(新編) · 속수(續修)하고, 족보 편찬의 사상 · 체례 · 형식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1980년대 이후 개혁 · 개방이 진척되고 대륙 중국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한편, 화인들의 뿌리 찾기와 수묘(修墓) · 제조(祭祖) 활동, 종족 활동에 대한 통제의 완화와 억눌렸던 종족의식의 회복, 유명인 족보의 출판과 지방지 편찬 등을 계기로 족보 편찬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 편찬된 족보는 신편지방지(新編地方志) 체례의 사용, 촌지(村志)나 가족사 형식 족보의 등장, 연종보(聯宗譜)의 성행, 수보 담당자의 다양화 및 학회나 전문기업의 족보 편찬 담당, 기부액에 따른 지면 크기와 편집의 차별화, 족보 판매 등 경비조달 방법의 다양화, 여성의 수보 참여 및 그 자녀의 입보(入譜)와 같은 족보 내 평등사상의 구현, 정부 선전 자료와 같은 관변 자료와 종족의 인구통계표의 수록, 비공식 출판과 컬러 인쇄의 성행, 성대한 족보 반포 의식 등이 특징이다.

 

한편, 족보는 많은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기 종족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명사나 황제 일족을 시조로 삼는 초기 기록을 제외하면 비교적 신빙성 있는 자료로 평가되었다. 또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편찬되고 가족이나 개인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가족사나 종족사뿐만 아니라 인물 연구, 인구 연구, 기층 사회 연구 등에 필수적인 자료로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에 중국 정부, 출판사, 학회 등에서는 기존 족보의 수집과 영인, 각종 족보 목록의 편찬과 디지털화, 족보 도서관 및 연구소의 설립, 족보 관련 학술대회의 개최 등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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